그에 대한 이야기는 출생부터 소문, 나쁜 소문이 더 지배적입니다. 여불위가 이미 임신한 첩을 장차 아버지가 되는 영이인에게 보내어 결국 여불위가 그의 아버지라는 것. 반고의 한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그것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만 하고 생부라는 말이 없다고 그것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유교쟁이들이 그를 미워해서 뭐든지 깎아 내리려고 만든 흉한 말들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부르는 명칭에 대한 해설이 없었네요. 진시황제秦始皇帝, 秦은 나라 이름이고 始는 '처음'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진나라 최초의 황제라는 뜻입니다. 황제라는 명칭도 그가 처음으로 썼습니다. 전에는 王이라 했고 그가 황제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면서 이후로는 이세황제, 삼세황제, ... 그러면서 민세황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답니다. 희망과 달리 이세황제 호해가 환관 조고에게 놀아나 거의 들어 먹고 삼세황제 자영은 뭣도 모르고 유방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그 엄청난 통일제국 진나라는 망합니다.
그의 이름. 영정嬴政, 이게 또 애매한데 위키백과 등을 따르면 성이 嬴이고 씨는 조趙라고 합니다. 지금은 '성씨'라고 함께 쓰고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는데 당시는 '성性'은 어머니의 것, '씨氏'는 아버지의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조이인이고 어머니는 영씨였다는 건데 나무위키는 부모 모두 '조'씨로 소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서는 그의 이름을 '영정'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국의 역사서는 통일된 것이 없더라구요.
제일 큰 누명은 바로 분서갱유입니다. 焚書坑儒.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파묻다. 이 일로 거의 모든 책이 불타 없어지고 엄청난 유학자들이 산채로 묻혀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이것도 위키백과는 잘못된 소문으로 누명을 씌웁니다.
먼저 이 일은 두 가지 다른 일입니다. 먼저 분서.
BC213년 34년. 백사 순우월이 상, 주 두 나라처럼 아들과 형제들에게 분봉하라고 상소합니다. 황제는 이전의 봉건을 확기적으로 탈피하여 완전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그것이 잘못이니 다시 분봉하라고 상소한 것입니다. 당연히 분노하였고
. 유가서를 불태우라. 60일까지 시행하지 않으면 경형(얼굴 문신)을 시행하라.
. 고대가 좋고 지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그의 집안 전체 처형한다.
. 박사 연구용 유가서, 의학서, 점복서, 나무에 관한 책들은 분서에서 제외한다.
- 백양중국사
동일한 해. 사관에게 진의 책이 아니면 모두 태우고 박사관이 주관하는 서적 외의 책들, 시, 서 및 제자백가서를 태우라. 두 사람 이상이 만나 시, 서를 거론하면 저잣거리 사형. 과거로 현재를 비난(是古非今)하면 멸족하라.(시는 시경, 서는 서경을 말함). 불태우는 것 30일 한도.
- 사기
- 십팔사략
이것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유가의 책이라 해도 박사들이 공부하는 책과 백성들이 먹고 사는 데 관련된 책들은 분서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제도를 비판하는 것을 막은 이유는 그가 행한 제도의 혁신은 객관적으로 지금 보더라도 아주 훌륭한 것들 이었는데 유가, 유교쟁이들은 무조건 과거를 따르는 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여 무엇이든 바꾸지 않으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그가 혁신한 것들은 화폐, 문자, 도량형, 운하 등 아주 훌륭한 것들이었고 다툴 여지가 있는 것이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것인데 중국은 이후로도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쓰는 게 아니고 섞어서 써 왔으니 그것만 시빗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변명을 해주자면 앞의 나라들이 봉건으로 망했으니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고 뒤 이은 한나라는 군현제로 망했으니 다시 봉건하자고 하지만 실은 섞어 씁니다.
다음은 갱유입니다.
BC212년. 35년. 방사 후생과 노생이 법술이 신통치 않아 처벌이 두려워 도망가면서 시황제를 비방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양의 모든 지식인을 조사하여 죄상을 확인한 460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습니다.
- 백양중국사
내용 동일하고 부소가 반대하자 북방 상군으로 보냄.
- 십팔사략
- 사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유가를 멀리하고 법가의 사상을 중하게 여긴 것이었고 그런다고 어느 한 사상을 탄압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교를 상당히 가까이 했습니다. 도교 하면 도술이지요. 노자는 도가사상이지 도교가 아닙니다. '교敎'가 분은 건 종교화된 걸 말합니다. 이걸 업으로 삼은 사람을 방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갱유의 대상은 주로 방사였지만 유교사상가들이 평소에도 황제, 새로운 제국을 비난해왔기 때문에 그들도 일부는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교에 빠졌다는 이야기 입니다.
28년 서불이 봉래, 방장, 영주의 세 신령스러운 산이 있다며 신선 찾기에 나서는데 남자 아이 여자 아이 수천 명을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기에 나온 내용입니다.
BC219년 서복이 봉래산에 가서 선약을 구해 오겠다고 나섰다고 합니다.
백양중국사
이것도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같은데 다른 민간서들에서 이야기 하듯 많은 이상하고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복이 돌아오지 않으며 속은 줄 알았고 그 7년 뒤에 후생과 노생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미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