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길을 가면서 라디오를 듣고 있습니다. 월요일은 항상 듣는 방송이 없어서 손경제의 이종훈 작가가 대신 공부해 주는 걸 찾아서 듣고 있는데 '촌지'의 역사에 대한 게 있어서 그걸 들었습니다. 바깥에서 보는 교사에 대한 정보와 시선은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근거 부족한 악의적인 것이 너무나 많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 한때 봉급은 모두 저축하고 촌지로 생활비 충당했다는 건 정점입니다. 무슨 덕수도 아니고. 말도 되지 않는 걸 믿었다니. 작가는 스승의 날도 받고 가정방문 때도 받고 또 언제도 받았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렇게 바쳤을까요, 바치는 걸 보았을까요. 나도 끔찍하게 받는 걸 싫어 했는데 일 년에 두 번 들이미는 사람도 없었고 그러는 사람도 열 명도 되지 않았으니 경우에 따라 다른 거라고 해도 너무한 것 같아요. 강남은 두세 번 받은 것으로 일년 생활비가 되었나?한 달 생활비 2백이라 해도 일년이면 2천사백을 받았으면 긁어 모은 건데..
내 경험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일제고사 군내 2위 했다고 그 가난했던 살림에 돼지고기 삶고 한 대야 머리에 이고 힌 사간 걸어 학교에 찾아 대접했던 것과 고등학교 일문계 광주로 원서를 써지지 않는다고 돈달라는가 보다고 학교 찾은 거 딱 두 번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아예 최하 빈곤층이어서 고개 처박고 공부만 해서 세상 물정 몰랐는데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2년 후배가 당시 바쳐졌던 걸 듣고 놀랐지만 몰랐던 거여서 그랬지 내역이 놀랐던 규모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후반기에 처음 듣는 충격적인 내용이 나왔습니다. 문교부(현재는 교육부)에서 공문으로 전교조 교사 판별법을 내려 보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학교단위 평교사협의회가 전국교사현의회(전교협)으로 하나로 묶였고 탄압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그게 89년 연초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주 빠르게 조직이 꾸려지고 노동조합으로의 전환이 논쟁을 통해 반대의 의경이 있었음에도 진행이 되고 5월29이었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결성대회를 막기 위해 모든 행정력이 동원 되었고 힘든 과정을 거쳐 창립 선언을 했습니다, 죽이겠다고 달려 들었고 죽음으로 맞섰습니다. 가까웠던 초등에 있었던 사람은 수업 중에 경찰이었던(잎사귀 4개) 아버지의 손에 말 그대로 머리 끄덩이를 잡혀 끌려나간 뒤 1주일 동안 자신의 방에 갖혀 살았습ㄴ니다.
난 이 공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명단 공개에 대해 의견이 많았지만 대부분 공개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인정하기 어려워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이건 경향신문에 나온 것이고 한겨레, 시사인 등에서도 기사로 나왔던 걸 확인했습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전남에서는 학교 민주화를 위해 관리자와 면담하고 싸울 때 보통 무리 지어 했기 때문에 그냥 노출이 되었던 거라 그랬습니다. 조합원과 후원회원이 구분이 되었고 무관심자와 극력 반대자의 4가지로 구분했기 때문에 활동을 하면서 자연히 노출 된 거였지요. 물론 쪽수가 많다고 엄청 으스대었던 여수(그 때는 내가 속한 여천이 분리되었을 때)는 한때 주먹을 섰다는 지회장이 문제가 있다는 신고가 있으면 혼자 가서 교장을 을러 대서 조합원 노출이 거의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이제사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닙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하려고 했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정부와 대다수의 국민, 그리고 조합원이 아니었던, 전교조 집단을 배척했던 교사들은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바로 이 점입니다.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바로 생각이 든 한 예가 있습니다. 여수화학고등학교에서 바로 옆의 공단으로 인원을 일부 공급하는데 이 대 면접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회사 면접관이 기피하는 사원. 자기주도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자. 리더십이 있는 자. 이런 학생은 무조건 떨어뜨린다고 들었거든요. 처음 듣고 놀랐는데 3초도 안 되어 이해 되더라구요. 바로 이런 수동적이고 긱적인 인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질서에 순응하는. 지금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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