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3일 수요일

보석함

   아이들 한지공예할 때 함께 끼어서 보석함을 만들었습니다. 만들어 온 종이를 붙이것것부터 풀을 먹으면 종이가 물러져서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붙이는 것까지 시간이 되어서 나머지 작업은 설명만 하고 수업은 끝났습니다. 월요일에 풀칠 한 번 더 하면서 수정하고 화요일 풀칠 한 번 더 한뒤 어제 마무리 코팅하고 오늘은 장쇠와 장식을 달았습니다. 뜻밖에 비스가 작아서 이걸 다는 데 힘이 들었습니다. 안경드라이버를 빌려서 손잡이에 고무줄을 감아서 썼습니다.





초생달

  며칠 전 16일 밤 산책을 나섰는데 그렇게 찍고 싶어했던 초생달이 떴습니다. 그 위로 환하게 떠있는 두 별은 목성과 토성이 21일에 나란히 보인다고 했으니 그들이 아니고 금성과 수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남자, 남자?

   이틀 동안 계속 뒹굴거렸으니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일요일 밤을 푹 자기 위해서 자는 시간을 늦추며 미우새를 보았습니다. 패널로 나온 늙은 아줌마들이 한결같이 남자들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 없는 게 좋은 존재이며 잔소리까지 한다는 겁니다. 전에 김민식 피디의 글에서 조금 언급을 한 적 있지만 다시 내 부모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조금 입장이 다르다면 먹물든 남자와 못배운 여자이고 살림에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남자와 그런 살림과 여섯 아이들 보살펴야 하는 여자의 차이입니다. 또 차이는 결혼생활 30년 쯤에 식솔들을 살림과 함께 꾸려 대처로 나왔고 아버지는 그 집에 남았다는 것입니다. 쉰 중반에. 식구들이 나가는 것에 별 반대나 저항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잔소리와 멸시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능프로그램에서는 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 편집을 당연히 했겠지만 거기 나온 남자들은 왜 나오는 걸까요. 특히 어제 이태성의 아버지는 함께 사는 손자의 비웃는 표정을 보아가며 한자자랑까지 해가며 잔소리를 해야 할까요? 박찬호는 많은 사람들이 TMT라고 말하고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왜 그런 자리에서 그런 짓을 계속할까요? 중요한 건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싫어 한다는 겁니다. 말많은 놈끼리 자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이할아버지의 말이 박찬호를 향하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바로 보였습니다. 두세 개의 문장에. 박찬호는 예능에 나오고 싶어 그런 비호감을 자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할아버지는 전국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가 욕하며 비웃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계속 나올까요? 물론 이 둘뿐 아니라 거기 나오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해당되지만요. 참 웃기는 게 방송컨셉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아프면

   나이들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건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치면 오랜 시간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살이 찌면 운동하기 싫어지게 될 것이고 몸은 회복되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픈 것도 두렵지만 그와는 덜 합니다. 힘들면 약을 쓰면 짧은 시간에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토요일 아침 일어났을 때 한기를 느꼈습니다. 전날 춥게 두 시간 운동을 한 것이 문제여서 몸살이 들어오려나 했고 종일 누워서 진정해 보려고 했는데 해가 지면서 설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관장하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열세 번을 내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두 번을 더 뱉고는 끝이 났습니다. 어디서 그런 물이 나오는지 신기했습니다. 10번에 가까워지자 탈수가 두려워 쑥차를 끓여 두 잔을 마신 것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부터 아침에 있었던 열이 뱃속에 생긴 염증이었고 원인은 모르지만 외부의 침입이니 몸을 비우면 진정이 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로환을 먹을까 생각했는데 참았습니다. 큰 놈은 내 사정을 몰랐고 일찍 들어온 내게 아홉시쯤 들어온 그가 왠일이냐고 물어 설사와 열이 있다고 했더니 누워서 폰을 가지고 놀던 그가 '코로나19와 증상이 같은데?'라고 합니다.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증상이 두 가지 뿐이고 그럴만한 접촉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어제도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기운이 소진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아침은 누룽지 먹고 소금들어간 것 피하고. 종일 화장실 가지 않았고 아랫배 약간의 기분나쁜 느낌만 있고 아팠던 건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틀을 최소한으로 먹었더니 기운이 없네요. 아팠을 때 차라리 혼자였으면 서운한 게 없었을 건데...

2020년 12월 7일 월요일

미친 놈

   인생 이야기하다 보니 나훈아의 '테스형'이 생각났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정말 미친놈입니다. 이놈 저놈 다 따라 부르지만 '세종형'이나 '공자형'이라고 했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뻔하지 않습니까.

어떤 삶을 원하는가

   어제 신문에는 대한민국에서는 평생 45세 때 제일 많이 번다고 하였고 며칠 전에는 복잡한 지적능력은 35세 때, 단순한 지적능력은 45세 때 제일 최고조에 이른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여튼 그 말은 그 시기가 지나면 기운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어느 정도까지 떨어져도 삶이 행복할까요. 신체적 정신적으로.

  요새 사람들이 기억력에 대해 많이 푸념을 하고 내가 일 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또한 앉아있다 일어서며 자연스럽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기대치를 낮추면서 행복해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노래 둘을 비교합니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

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료

 

하지만 이것만은 변할 수 없어요

새들이 저 하늘을 날아서 가듯이

달이가고 해가가고 산천초목 다 바뀌어도

이내몸이 흙이 되도 내 마음은 영원하리

 

육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왼쪽은 몇십년 된 서유석이; 부른 김광정의 '가는 세월'이라는 노래이고, 오른쪽은 몇년 전에 나온 이애란이 부른 김종완의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2020년 11월 24일 화요일

점심시간의 배구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점심시간에 함께 모여 노는 건 없었습니다. 4교시가 12시10분에 끝나고 5교시가 12시55분에 시작하는데 그 정도면 이전 학교 경험으로 20분 넘게, 30분까지도 놀 수 있는데 급식을 만찬처럼 천천히 먹고 노닥거리다 오후 수업을 들어갔습니다. 먼저 내 반 아이들을 득달해서 축구를 시작했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데 두 달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큰 학교는 운동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경쟁이 붙으니까 끌어내는 데 한 달 정도면 충분했는데 그런 게 없는 환경에서 내내 자란 아이들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못된 체육과가 전근 가고 올해 배구를 가르친 다음부터 축구가 푸대접을 받고 아이들이 배구만 하려고 합니다. 난 선출에게 배워서 규칙과 훈련, 실전을 원칙대로 알고 있는데 자꾸 한두 놈이 끼어들어와 자신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먼저 내게 배운 것과 다르니 아이들이 힘들어 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인간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잘난 체하려고 그러는 건 알겠는데 가르치는 게 내용이 잘못된 것을 아이들이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체육관에 들어 오면 알아서 서브연습을 하는데 연속 3회 성공하면 수비와 공격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30분쯤 되면 편을 짜서 시합을 합니다. 시작할 때 원바운드 3개 허용했는데 1개를 거쳐 전번 주부터 원바운드 없애고 6인제 코트에서 원바운드 없이 합니다. 3학년 여학생들이 오지 않아서 11명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점심 때 자주 빠지니까 항상 하는 아이들과 실력차가 나고 그러다보니 아예 나오지 않는 거죠. 팀을 가를 때 주먹가위로 하는데 시간도 많이 들 뿐 아니라 잘하는 놈들이 패턴을 만들어서 몰려다녀 편을 만들어서 제비를 만들었습니다. 체육관에 들어오면서 하나씩 뽑으라고. 뭘로 제비를 만들 건지 교사 안팎을 세 차례를 돌면서 선택한 것이 요것입니다. 개나리 나무인 것 같습니다. 절반을 아랫 부분 껍질을 벗겨 내고 색칠을 하였습니다.





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어떤 사회가 올까요

   아침 신문에 강준만의 종이신문에 대한 칼럼을 읽었습니다. 전에 이미 블로그에 올렸던 그 사건(!)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어서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매년 하는 한국미디어패널조사의 결과인 건데 2019년 4,583가구 10,8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로 2020년 4월 15일 발표한 것입니다. 제목은 신문기사 이용자 특성 분석.




  아예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 줄 몰랐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몰라도 된다는 건지 신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잇다고 자신을 하는 건지 이건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치는 관심을 가져야 할 일 아닙니까.




  이 데이터도 재미있습니다.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강준만이 다룬 건 이 데이터였습니다. 종이신문은 노인들의 것이라는. 


  신문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사회를 이해한다는 건 이해가 어렵습니다.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이 방송의 뉴스를 본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고, 책을 통해 얻는다는 건 개인적인 편향에 빠지는 일입니다. 신문도 읽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앞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종이신문은 여러 단계의 팩트체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가짜 뉴스에도 그 회사의 입장이 논리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수단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그러든 말든 종이신문은 그래프에서 보듯 사라져 가는 게 확실히 보입니다.

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평등

   예수가 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장터에 가서 여러 차례 일꾼을 데려다 썼는데 그들 모두에게 1데나리온(당시 하루 품삯)을 약속하였답니다. 일이 끝나고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약속대로 1데나리온을 지급하였는데 맨 먼저 온 사람도 같은 품삯을 받자 항의하였다고 합니다. 주인은 자신이 불의를 저지른 게 아니고 당신과 약속한대로 당신에게도 1데나리온을 지급하였다고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2천년 전의 그 분의 생각을 지금도 감히 '공정'이나 '평등'을 생각한다는 나도 따라가기 힘듭니다. 20대의 보수는 무엇이고 의사들의 밥그릇지키기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또 진보를 고민함

 20대의 보수화는 확실한데 그 이유가 생각치 못한 것입니다. 복지가 진보의 중요한 상징의 하나인데 복지가 강화되면 소수 계층인 자신의 세대가 다수 계층(노인네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복지축소의 방향으로 간다는 것. 이들에게는 기독교적인 동정도, 불교적인 자비도, 유교적인 긍휼은 커녕 사회적 의식은 눈곱만큼도 없네요.

  김기식의 칼럼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사민주의를 기반으로 주목받는 복지국가인 스페인은 거의 모든 시민이 세금을 내며 현금복지급여에도 세금을 물린다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그 생각을 따라간답니까. 노동자의 절반이 면세자이고 자영업자들도 지금보다 세율을 더 낮추고 고소득에만 세금을 더 물려 복지재원을 충당한다는 것은 '곡학아세'라고 선언하네요.

2020년 11월 18일 수요일

웅천 체험학습

 패러세일링





가방 만들기

   학부모 평생수업으로 숄더백을 만든다는데 3명만 온대서 함께 끼어서 했습니다. 자연스런 붓자국을 넣었는데 강사랑 기술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더니 강사가 열심이 자국을 지운다고 했는데 많이 남았습니다. 근데 난 결과물에 만족하거든요. 결과물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구요.





2020년 11월 16일 월요일

견지망월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 하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네.오느 고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그가 글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실망하니 그 사람에게 한 말이 가르침은 달이고 문자가 손가락인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한 말이랍니다. 신문 기사를 검색하다 눈에 띄는 게 있어 확인해 보니 본문은 없고 사과문만 있었습니다. 칼럼에 대해 신문사가 사과하고 글쓴 본인이 함께 사과하는 건 처음이어서 찾아보려 했더니 완전히 지운 뒤였습니다. 어떤 사람들 표현으로 옛날 사람(꼴통이겠죠)이어서 종이신문을 보기 때문에 어젯반에 전번 주 신문을 읽어보니 원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을 읽었는데 부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신문을 찢어 와서 스캔을 떴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을 읽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로 나는 생각됩니다. 자신의 가치판단으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것이지 아버지의 폭력을 어머니가 자초했다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여론을 지배하니까 뭐. 
 사과문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9146.html
사과문이 먼저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원문입니다.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금탑사

   전전번 주 일요일에 마누라 성화에 여행을 갔습니다. 단풍나무길이 유명하다는데 들어본 적이 없어 검색해 보니 비자나무 숲이 검색 되더라구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는 판단이 들어 가보았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낙엽이 우수수!!!!



  거기서부터 절까지 간간히 교행로가 있는 외길인데 한참을 가니 절이 나왔습니다. 단풍나무 길은 그 길을 갈 때 있는 게 아니고 위의 느티나무가 있는 그 길에 있었습니다. 절은 삭축 위에 지어서 멋있긴 한데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절 아래에 비자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꽤 오랜 나이가 느꼊비는 나무들이었습니다. 몇 개열매를 주워 왔습니다. 




2020년 11월 1일 일요일

종교의 한계, 편협성

   나는 한 사람의 정치적 이념성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질문이 '준법정신'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판단하는데, 유죄라고 판단하면 상당히 큰 제약이 따릅니다. 매울 신辛자가 죄인에게 문신을 새기는 도구의 상형자라고 하는데 새기는 과정이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걸 새기고 이후의 삶을 사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미 현행법으로 처벌을 다 받고 출소하는 자를 이후로도 사회와 완전히 격리해야 한다는 것까지 이르면 그들은 보수의 가치까지 훼손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법을 먼저 고칠 일이지 준법을 외치는 사람이 법을 넘어선 벌을 주자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이르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내부에 머무르면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바람직하게 쓰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와 집단화하고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주장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도 보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됩니다. 아침 뉴스에 그리스 정교회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걸 보고 그들의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유대교인데 거기에서 기독교가 파생합니다. 로마의 주종교였던 유대교는 신생 기독교를 핍박했고 콘스탄티누스가 공인(국교가 아닌 다른 종교와 같은 자격 부여)한 뒤로 반대로 기독교가 유대인을 차별합니다. 내용은 아는 바와 같이 일반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여 모두가 기피하는 걸로 먹고 살게 되는 데 그것 중 대표적인 것이 대부업이고 현대 금융업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7세기 이슬람이 갈라져 나옵니다. 중세를 거치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나며 가톨릭의 부패를 공격하며 신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종교의 특징은 어머니가 같음에도 자식들이 서로 원수 보듯 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그들의 창시자를 모욕적으로 풍자하는 만평을 실은 잡지사 공격부터 아침 뉴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우러르는 대상을 모욕하는 일은 그냥 금기사항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로 선포합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은 아니었지만 로마에서 중세에 이르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하느님'에서 파생된 그 종파들은 모두 이렇게 해왔습니다. 종교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불교는 종파가 여럿이지만 싸우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견제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종교로서의 불교가 타락하기는 했지만.

  선가에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단하소불'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마조선사로부터 '천연'이라는 법명을 받아 단하쳔연으로 불립니다. 어느 겨울 산행을 나섰다가 추워서 절에 들어가 목불은 마당으로 가져와 쪼개어 불을 피웁니다. 그 절을 지키는 노승이 내려와 호통을 치니 '사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뒤지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자 노승이 나무에 무슨 사리가 나오냐고 대갈을 합니다. 천연은 씨크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되었구려."

  나무로 있던 것을 깎아 모셔두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따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자신의 숭배대상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따름입니다.

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달무리

 그젯밤 산책을 다녀 오다 달무리를 보았습니다. 휴대폰으로 찍은 거라 상태가 그리 좋진 않은데 요새 하도 자신의 사진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내어 놓지 않아서 올려 놓습니다. 아래의 것은 동영상을 캡쳐한 것입니다.





유교의 계보

유교儒敎(공자) 춘추시대

↓유가儒家 내성파(맹자)와 숭례파(순자) 전국시대

↓훈고학訓誥學 한나라, 당나라 경정의 해석에 치중

↓성리학(性理學주자학) 송나라 때. 性命義理之學의 준말.

↓양명학陽明學 명나라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

↓고증학考證學 청나라 실사구시實事求是 객관적 실증적 태도 견지

2020년 10월 27일 화요일

배구로 놀기

  적은 수의 아이들과 놀 때는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학생 모두로 하거나 제일 못하는 사람을 나와 묶어서 하거나. 어제는 1:4로 했습니다. 네트는 그대로 하고 코트는 좁히고 원바운드는 하나씩 허용하기로. 이거 운동하는 데 최고입니다. 10분쯤 넘어가면 숨이 턱에 오릅니다. 잔근육과 순발력을 키워주는 데 효과적입니다.




배구 훈련

   월요일에 끝난 감사 지적사항을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수학성생님을 부른대서 복도를 보니 2학년 아이들이 신호를 보냅니다. 수학시간에 놀자는 거죠. 지금은 교육과정이 너무 널널해서 일주일에 두 시간만 해도 천천히 해도 될 정도입니다. 꼼꼼하게 가르치라는 거지만 하지 않겠다는 아이들은 더 시간을 가질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입니다. 학생이 5명인 학급인데도 아예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는데 수학공부하자고 강요해봤자 서로 스트레스 받고 미워하게 될 뿐입니다. 체육관에 가서 놀았습니다. 송빈이는 점심시간에 하지 않기 때분에 서툴고 다른 아이들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찍은 건 노연이인데 몸이 불편해서 함께 놀지 못해도 수학공부 하지 않는다는 게 좋으니 흔쾌히 찍었습니다.




중국 고대 왕조

   중국 고대 왕조입니다. 상황오제는 선사시대이고 전설의 시대로 봅니다. 근대에 상왕조까지도 선사시대에 포함했지만 20세기 중반 많은 발굴을 통해 상나라의 실존은 밝혀졌고 하나라도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2020년 10월 22일 목요일

인지상정?

   얼요일 죽녹원에 가서 본 것입니다.




  팻말이 이상해서 살펴 보았더니 그 작은 대나무에 이름들과 메세지를 새겨 ㄶ은 것이었습니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고 산책길 따라 어디에든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북한산 계곡의 바위에 많이 있답니다. 검증된 사실은 아닌데 신문에서 본 것 같습니다. 이름을 새기는 사람을 발견하고 법으로까지 금지한 것을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답니다. 오래 살라고. 욕먹으면 오래 산다고들 하기 때문에. 꾸며낸 것 같기도 하지만 신뭉에서 본 걸로 기억합니다.

  실은 이렇게 유명 관광지에 이름을 새기고 이름 쓴 리본묶고 열쇠통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 더 가볼까요? 선조들 중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인물들도 많이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지난 권력자도 그랬구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자신이 세운 공적비가 있습니다. 실은 다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밥상

   관사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궁핍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하나씩 채우다 보면 나중에 빠져 나올 때 이삿짐을 여러 번에 날라야 합니다. 관사에 들어왔다는 것은 매일 출근이 힘들어서기 때문에 이삿짐이 많으면 몇 주에 걸쳐 날라야 하고 그러면 마지막 주까지 남아야 하는 짐을 꼼꼼히 계산해야 하고 그렇게 해도 뒤로 갈 수록 생활에 불편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관사에서는 필요한 건 대체품을 찾아보고 부족한대로 사는 게 중요하고 그래도 나올 때는 짐이 한 번에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겨두고 나오는 것이 방법입니다.

  작년에 진로체험으로 했는지 제법 그럴싸한 밥상을 만들었습니다. 혼자 쓰기에 딱 적당하고 접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교실에 두지 말고 가져가라고 한 달을 넘게 말을 해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어서 버리겠다고 했더니 딱 하나가 남아서 다시 물으니 버리랍니다. 현명한 아이죠. 그거 집에 가지고 가봐야 짐만 됩니다. 조그마한 교자상이 집집마다 얼마나 많은데.

  그 때 아래 고등학교 관사 입주가 가능하다고 알려 왔고 상을 꼬불쳐 두었습니다. 접을 수 있던 게 오히려 불편해서 볼트를 조여 고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봄에 찍고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입니다.




  그리고 엊그제 찍은 사진입니다.



  밥을 말아먹지 않는데 전날 갑자기 마누라가 와서 밥을 한 것이 남아서 관사생활 처음으로 찬밥을 아침에 먹게 되어 뜨거운 국에 말아 먹은 겁니다. 두 상의 색깔이 달라졌습니다. 6월이 넘어가던 즈음 고등학교 화단에서 땡감을 하나 따서 북채로 짖찧은 다음 펴 발랐습니다. 저렇게 색이 드는 데 걸린 시간이 거의 두 달쯤 되어서입니다. 처음엔 한 번 더 바르려고 했는데 색이 변하지 않아 기다리다가 변한 시점은 감이 익어가기 시작한 시점이라 고민하다 생각을 접었습니다. 

  이치가 어떤 건진 모르지만 땡감 물을 바르면 색깔도 예쁘게 나고 벌레를 막는 효과가 있는데 단감을 쓰면 색깔도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벌레도 꼬이고 썩기도 하거든요. 개도에서도 그랬지만 저 상도 물려 주면 서로 갖겠다고 할 것입니다.


2020년 10월 15일 목요일

내색

   어떤 일을 할 때 모르게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알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게 하는 경우 대놓고 내색하면 할 일의 칭찬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은근하게 해야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누군가는 해야 하는 그런 일이 그렇습니다. 

  아침에 정원 손질한다고 교사 앞 길이 잘리워진 나뭇가지와 풀잎들로 덮였습니다. 현관 앞을 중심으로 비질을 했는데 일부러 비질한 곳과 하지 않은 곳이 선명하게 보이도록 해놓았습니다.




사무실

   사무실은 여럿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차를 만들고 설거지하는 공간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지만 사무실도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 합니다. 교무처럼 툭하면 노래를 스피커로 듣거나 행정사처럼 원격연수를 스피커로 듣거나 전근 간 과학처럼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하니 이렇습니다. 





  저렇게 퇴근하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왼쪽의 사람은 딱 저 자리에서 낮잠을 잡니다. 그 모습이 예쁘게 보일 리 없는데 자주 자면서 전체가 볼 수 있는 자세로 자는 겁니다. 오른쪽 건너편의 평소 젊잖하다고 생각했던 삼총사 중 또 하나도 어제 그렇게 자길래 속으로 혀를 찼습니다. 저 의자 둘과 오른쪽 보이지 않는 또 한 사람은 근가 호봉이면서 동네가 같아 항상 어울려 다녀서 프린시펄이 삼총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 가능한 추측을 했습니다. 이들 의자의 뒷쪽이 창문이거든요. 빛을 피하려고 그런다는 게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잔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2020년 10월 14일 수요일

달라진 것

   세상에 달라진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전에는 선생님이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고 하면 서로 하겠다고 난리였습니다. 지금은 하다 못해 교실 창문을 여닫는 것도 콕 짚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명하여 이야기하면 왜 자신이 해야 하냐며 항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구요.

  청소는 계급이 낮은 사람이 해야 한닥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공간을 자신이 청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옛 이야기입니다. 내가 청소를 하고 있으면 전에는 학생들이 비나 걸레를 빼앗아 자신들이 했지만 지금은 그냥 지나갑니다. 간혹 "선생님, 저기도 있어요."라고 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리 드물지 않게.

  아침에 몇 명과 현관 앞에서 배구를 합니다. 잘 하는 아이들만 참가합니다. 배구공은 내가 가진 걸 교무실 캐비넷에 두고 쓰는데 먼저 온 하고 싶은 아이가 알아서 가지고 나옵니다. 들어갈 시간이 되어서 들어가자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교실로 달아납니다. 그거 가져다 놓기 싫어서.

  세상이 달라지면 마케팅 기술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올 연초에 텔레비전 광고를 보다가 뭘 광고하려는 건지 몰라서 몇 번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광고주들이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나한테는 팔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광고를 할 때 특화시켜서 한다는 겁니다. 아이폰 광고를 나이든 사람들에게 해봤자 살 일이 없고으니 모두를 대상으로 광고하는 게 아니라  젊은층을 들뜨게 하는 것만 강조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를 대상으로 광고를 만들면 밋밋해 지니까.

  음악도 그렇다는 배순탁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예전엔 어른들 부르는 노래를 아이들도 부르고 다녔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연령층 상관없이 다 부르고 다녔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BTS가 펄펄 날고 있지만 '작은 것들~'이 어쩌고 하는 것의 내용도 관심없고 또 알 수도 없게 가사와 곡이 그렇습니다. 90년대만 해도 랩을 따라불렀습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머피의 법칙이나 상상속의 너같은 그런 노래는 부릅니다. 지코나 도끼 노래는 모릅니다. 따라 부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알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만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쨍하고 해뜰 날'이나 '헤이 주드'에는 고개 돌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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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1일 일요일

표현하기

  의사意思없는 지성은 무가치하고 지성없는 意思는 위험하다. -한스 폰 젝트
  제아무리 많이 알고 바르게 산다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행동하는 건 위험하다고 한 말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이 사람을 검색해 보았더니 1차 세계대전 때 군을 이끌던 고위 장교였고 패전한 뒤 군대를 잘 지켜 내어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을 뿐 아니라 장제스의 도움 요청을 받아 고문 역할도 한 아주 못된 인간이었네요. 그런데 여튼 이 말은 내가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인데 대학 때 어디서 읽은 건가 본데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표현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전제가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말이 '공격'이나 '부정'을 할 땐 더더욱 확실한 검증을 거친 '사실'이어야 합니다. 수학에서도 참, 거짓을 말할 때 '참'이라고 할 때는 그 근거를 말할 필요 없는데 '거짓'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최소한 하나라도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는 한겨레신문이 나쁘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으니 조국 사태(그의 표현) 때 조국과 민주당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문을 읽었는지 누가 그러던지 물었습니다. 당연히 답이 없습니다. 내가 월요일 아침까지 신문으로 보고 금요일 들어가면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일치의 신문이 배달된 모양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성인 둘이 있어도 다 아예 거들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건 잘못 된 주장이며 계속 보고 있는 내가 본 것은 균형이었고 그런 논조에 화가 난 민주당과 조국 지지자들이 대거 구독을 취소해서 신문사에서 두 번이나 입장문을 낼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그의 태도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관련 기사를 문자메세지에 링크 걸어서 보라고 보내고 그거 보고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일언반구 없습니다.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거죠.
  주식에 양도세를 물리는 정책을 추진중입니다. 주식 양도세를 내는 주주의 대상을 10억에서 3억으로 기준을 내린다는 방침이 나오자 청와대 청원까지 올리고 난리입니다. 종목당 3억이나 가진 사람이 전체 보유자의 1%에 불과한데 왜 저 난리들일까요. 그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매도하면 장이 폭락하기 때문이랍니다. 정책을 만든 사람들이 바보거나 여당 망하라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내내년 대선과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시장 폭락할 일을 추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격이 떨어지려면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대주주가 팔면 개미들이 사는 거 아니냐. 떨어지는 게 싫으면 사지 않으면 되고 그러면 떨어질 일이 없지 않느냐. 매도가 성립한다는 것은 매수자가 있다는 거고 자신이 한 일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폭락 전에 자신의 보유 주식을 미리 팔면 장이 폭락하건 말건 상관없는 거 아니냐. 그거 핑계로 대주주 편을 노골적으로 드는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걸 편들어 줄 수 없다. 이렇게 말을 해도 이런 말은 아예 무시합니다. 얼마 전 매도 양도세를 이익금의 3천만원 이상을 추진하다 반발에 부닥쳐 5천만원으로 올린 것도 이야기했지만 무시당합니다. 매도차액이 3천만원이면 얼마를 판 걸까요? 주당 100원의 이익을 봤다고 해도 30만주를 팔아야 3천만원 이익인건데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왜들 잘못 된 정보에 세뇌가 되어 진실을 외면하는 걸까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SNS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이 87%가 넘는다고 합니다. 제발로 찾아가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속에서 오류를 수정해 가며 정보를 완성해 갑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보를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의견은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전에 현종형과 성률이랑 이야기할 때 그 낌새를 챘고 그것이 일부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 땅 전체를 잠식하고 있네요.
  어쩔 수 없는 흐름이고 의견이 다른 상대를 설득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찌 될까요. 그 귀결은 아주 단순합니다. 서로 의견을 좁히는 게 끝난 곳에서는 결국 쪽수 싸움밖에 없습니다. 모든 정책이 그렇게 결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벌어질 일은? 민주주의가 사라질 것입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것은 다수자의 의견이 반영되어서가 아니라 소수들이 승복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토론의  과정이 생략되어 단순 정파싸움만 있고 표결로 정책이 결정된다면 다수의 결정에 불복하는 소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 갈등은 파국으로 이끌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종말인 거죠.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억새

어젠 산책을 조금 일찍 갔습니다. 다리 직전까지 갔다 오면 빠른 걸음으로 딱 60분 정도 걸립니다. 오는 길에 억새밭이 보였는데 아직은 활짝 피지 않았지만 다음 주까지 어떨지 몰라 다리를 걸어 찍었습니다.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새로운 흐름

젊은이들 힘들다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관찰하고 경험해 온 곧 젊은이라 불리울 학생들은 그 힘들다고 하는 젊은이가 왜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미리 보여 줍니다. 예전에는 공부를 해보다 해보다 힘들면 3학년 2학기 고입 원서를 쓸 무렵에 포기자가 나왔습니다. 전기전형 원서를 쓴 아이들은 결정한 그 순간부터 학교수업을 완전히 놔버렸거든요. 얼마 전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학년 때부터 첫째는 자신이 원하는 3년 뒤의 희망도, 대학에 대한 희망도, 직업에 대한 희망도 또렷하게 말해주는 학생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1학년 아이들이 6명인데 모두가 공부해서 대학을 가려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시늉'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습이란 것도 전혀(!) 없고, 작은 단원 끝난 뒤에만 단원 정리하는 문제 풀어 오라고 숙제를 내는데 집에서 해오는 학생 거의 없고, 이등병삼각형의 성질 같은 간단한 거 외워 오는 학생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공부하는 시늉은 합니다. 그게 가르치는 교사는 환장하겠는데 부모들은 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거죠. 정말 독하게 부모님들이 희망을 가자고 대학에 보낼 거라고 했다가 상처입을 거 생각해 보라고까지 했지만 하주 간단한 세번 네번 반족해 설명한 거 1~2분 뒤에 물어도 처음 듣는 것처럼 한다는 겁니다.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거죠. 게다가 아무리 공짜라고 방과후 수업을 보충수업으로 해달라고 해서 하는데 전혀 꽝입니다. 하는 척하며 하지 않는 학생들과 수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나요. 2학년 5명 중 4명은 명확히 포기했습니다. 한 명은 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신기하게도 가르쳐 준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뒤져라고 푸는데 한 시간에 서너 문제. 외우는 것도 젬병. 2학년 1교시 자율학습이고 2교시 수학 시험인데 1교시 지도교사로 들어갔습니다. 한 아이는 난데없이 색깔 칠해 가며 공책 쓰고 있고, 공부 하지 않는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시작하고 1분쯤 지나고 한 아이는 자고 한 아이는 공주 인혀으 그리고, 한 아이는 이러고 종 칠 때까지 보냈답니다.

2020년 9월 28일 월요일

불교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티벳불교의 근원은 자비와 인연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야 뭐 불교의 기본정신을 견지합니다. 하지만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대중에게 생산적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이 걸식하는 것이 대중을 자비로 보고 있는 걸까요. 불경을 외우기 싫어 불경 새긴 경판을 돌리면 외운 것과 효과가 같다고 믿는 그들이 진정한 불교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동양철학에 대한 서양인의 접근

그리스 신학과 철학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의 세례를 태어날 때부터 받고 생각이 굳어진 서양인이 동양철학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 항상 의심을 했습니다. 먼저 부딪친 게 노자의 야스퍼스 번역판이었습니다. 저명한 철학자이면서 노자의 연구도 깊다고 해서 사보았던 겁니다. 알아보기가 많이 어려웠는데 용어가 맞지 않은 점 때문이었습니다. 노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道'를 길로 번역한 것부터가 걸림이었습니다. 최근 KBS다큐 '다르마'를 보면서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보는 관점이 또 그런 관점이었고 그걸 제작한 사람도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불교를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통합적인 동양청학을 분석적으로 보는 관점은 당연한 것이고 아주 기본적인 용어의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존'을 'Lord"로 번역 하더라구요. lord의 옥스퍼드 사전의 뜻은 a man who has a lot of power in a particular area of activity로 나와 있습니다. 차라리 '스승'이나 '선배'가 나았을 건데.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동양철학이 어떤가 한번 들여다보자는 그런 태도로는 한국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 수준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도의 효과

리처드 도킨스에 소개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보통 어떤 주장, 특히 종교에 관련된 것들은 감정이 은근히 실려 있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을 시키는 경우가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러셀 스태너드가 '기도의 효과'를 학문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한 실험이며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영국의 저명한 종교과학자로 물리학자였습니다. 템플턴 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는데 그 재단은 기독교 관련 재단이었고 액수는 240만 달러였습니다. 심장동맥우회술 수술을 받은 병원 6곳 1802명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대조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를 받는 그룹과 받지 않는 그룹으로 나누었고 기도를 받는 그룹은 다시 기도를 받고 있다는 걸 아는 집단과 알려주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했습니다. 모두 3그룹, 기도를 받으며 그걸 알고 있는 집단과 모르는 집단, 그리고 기도를 받지 않는 집단. 기도자들도 미네소타주, 메사추세츠주, 미주리주 등 으로 정했고 기도받는 사람의 첫이름과 성의 이니셜만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와 템플턴 재단은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확신을 하고 실험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논문으로서의 필요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었습니다. 결과? 기도로 인한 긍정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딴 하나 의미있는 결과가 있었는데 자신이 기도를 받고 있다는 걸 아는 집단에서 합병증이 의미있게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것입니다. 애초에 그 종교가 유난히 샤머니즘쪽으로 꾸준히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성당)교회)를 부수라고 했다는데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당에서 한 것만이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잖아요. 물론 이 땅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2020년 9월 24일 목요일

안쪽의 별들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면 하늘에 떠있는 건 모두 별이라고 했겠지요. 산책을 하고 들어오다 보니 어느덧 깜깜해지고 별들이 떴습니다. 그 중 밝은 게 셋 떴는데 나란하게 보입니다. 맨 왼쪽 제일 작은 게 수성, 그 다음 금성, 그리고 반달입니다.

화정면

산책길은 두 방향이 있습니다. 숙소 나서면서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은 여러가지 좋은 점이 많은데 산길이 있어서 어두워지면 가기 무섭고 왼쪽길은 시간이 아쉽습니다. 길게 잡아도 한 시간에 불과하고 일부 구간은 찻길을 걸어야 해서 그도 무섭습니다. 짐승이나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쓰는 외국인보다는 불을 켜고 달려드는 차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늦게 출발을 할 때면 왼쪽을 갑니다. 항상 보는 바다라서 바다쪽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어젠 문득 돌아다 보니 하늘이 예뻐서 시선을 고정하니 섬들이 보입니다.
오른쪽의 불빛들은 백야도로 생각되고 저 멀리 기둥 두 개가 조발과 적금을 연결하는 교각으로 보여 한가운데 섬이 날도인 것 같습니다. 화정면이 다 보이는 셈입니다.

2020년 9월 17일 목요일

정의의 구현?

나에 관한 일인 경우 갈등이 생겼을 때 공정해지기 힘듭니다. 당연히 내 중심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더욱 공정하기 힘듭니다. 보통 '네가 이 일과 관련없는 제3자니까 네가 편정을 해줘'라로 많이 들 하지만 '제3자'의 맹점은 이 갈등에서 실제 원인이 된 '감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의 판정이 잘 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최소한 한 쪽이라도 반발하면 판정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고 말 뿐이고 둘 다 판정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사전 약속이 있어서 한 경우라고 해도 내심으로는 용납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판정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타협점을 찾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행선을 달리는 갈등에 끼어드는 것은 잘난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공정하다고 믿는 제3자의 대표적인 존재가 법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 이야기의 성격이 분명해 집니다. '법'이라는 것이 내게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됩니다. 왜 '내게'라는 전제가 붙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과 나는 정반대의 편에 서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법의 효용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법이 없으면 어떻게 사냐고. 나쁘든지 멍청하든지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현관앞에 있다가 뭔가 일상적이지 않은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벌새처럼 생긴 벌레가 가을에도 핀 낮달맞이꽃에 다가가려 애쓰는데 살펴보니 꽃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거미줄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 참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꿀을 빨기 위해 다가갔다가 꽃의 부근에서 거미줄에 걸린 벌레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걸 구해주고 仁이라고 공자는 말할 것이고 막내는 자비라고 말할 것이지만 난 참견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리에 와서 찾아보니 그 벌레는 박각시나방이랍니다.

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중2병인가?

00이는 아이들 속에서 보면 배려심도 있고 괜찮은 아이입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게 흠이지요. 지들 해야 하는 일이라 봐야 가지고 놀았던 공 제 자리에 둔다든지 청소한다든지 사소한 것들이지만 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또 못마땅한 것 찾으려면 배구만 하려는 것입니다. 운동되지 않으니 축구를 하자고 해도 축구하는 때면 온갖 패악을 저지릅니다. 내가 받아주니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요. 배구할 때도 다칠까봐 블로킹을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하는 것도 미운 짓이네요. 그러더니 최근 들어서는 수업시간에 공부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일부러 내게 반항을 하려는 것도 같고, 실은 반항보다는 앙탈이라고 해야 하나? 투정이라고 해야 하나. 중2병일까요?

보울 만들기? 아니 꾸미기

학생들 체험학습을 하면서 여유가 있다고 함께 해도 된다고 해서 참가했습니다. 세라믹 보울에 그림을 그려 주면 구워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도화지와 크레용조차도 갖춰본 적이 없어서 그림 그리는 것을 두려워 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려야 했고 아주 꽝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남다른 관찰력 덕분에 조금씩 비슷하게 그릴 수 있고 색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딘지 미숙해 보여도 내가 만든 것입니다.

몽어

숭어의 새끼를 몽어, 전라도 사투리로는 몬치, 모치라고 합니다. 물이 들면 해변으로 몰려드는데 숭어도 자주 몰려드는 듭니다. 훑치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죽창을 쓰기도 하고 들어가서 손으로 물밖으로 제쳐내기도 합니다. 어제는 화태 산책을 가다 예교에서 떼를 만났습니다. 김선생님이 그 동네 할머니께 빌린 뜰채로 짧은 시간에 다섯 마리를 잡았는데 더 잡을 필요 없어서 그것만 잡았습니다. 날 좋을 때 3일 정도, 그러니까 바싹 말리지 않고 겉의 물기만 완전히 마르고 누르면 약간은 말랑거릴 정도로 말려서(여기 사투리로 삐득삐득 말려) 구워 마요네즈 찍어 맥주안주로 하면 최고입니다. 회로 먹을 땐 익은 김치에 싸먹으면 맛있습니다.

2020년 9월 15일 화요일

반딧불이

귀신이니 도깨비니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들의 당시 정신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두려우면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현상들이 특별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보앗다고 말을 밖으로 뱉어내는 건 자신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때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커밍아웃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2학년 수업 때 화태 쪽으로 저녁산책을 갓다고 했더니 00이가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해서 어제 산책을 가면서 연락을 해서 함께 다리를 건너 갔다 왔습니다. 날씨도 흐렸지만 요새는 하루 무섭게 낮이 짧아지고 있어서 아이 두고 올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렸고 산길은 길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찻길로 가는 것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산길로 왔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도깨비불처럼 빛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방향이나 빠르기가 일정하지 않게, 어떤 건 아주 밝게, 어떤 건 희미하게. 소름이 돋더라구요. 반딧불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2020년 9월 13일 일요일

선택.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선택'을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항상 선택의 순간에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잇는 중요한 능력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장애는 특히 심하다고 합니다. 토론문화가 없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론을 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어느 편을 갖게 되는데 현대사만 해도 목숨을 건 많은 환란들이 선택을 기피하고 생존을 우선으로 두게 된 것이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막아 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로 이견을 봉쇄하는 것으로 한 가지 생각만 옳다는 것으로 몰아왔기 때문에 가만히 의견들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 보다 다수의 편에 붙는 생존법이 점점 강화되어 현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가치에 대한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단순한 지식에 대한 질문마저도 대답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훈련을 통해 능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들을 고민하고 그 상황에 제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제일 흔한 '음식 선택'. 오죽하면 텔레파시 시험의 첫번째가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여성들의 화법까지 번져 갔습니다. '금성 여자'로 포장하지만 한반도의 역사에서 환난을 교묘하게 피해 나왔던 충청도 사람들의 화법과 아주 동일합니다. 애매한 표현. 그것은 자신들의 장양할 만한 언어적 특성이 아니고 자신의 언어적 표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기 위한 얄팍한 수싸움일 뿐입니다. 토론의 장으로 나오면 단 일분도 맥을 추지 못하는 얄팍한 수. 선택에 대한 장애는 국정을 논하는 이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선택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무조건적 부정적인 거부로 나타납니다. 의견이 다르면 다른 지점을 판단하고 절충이나 분쇄로 나가야 하는데 다른 의견이 나오는 순간 상대의 의견에 대해 이해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의견을 분쇄할 수도 없게 되고 반대만 하는 것입니다. 2차 재난지원금에 대해 이재명이 이야기한 지원금의 성격이 '구제'가 아니라 '경제활성화'여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분노 어린 공격도 그의 의견을 아예 이해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국민은 가난보다 공정하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는 의견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듣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한 뒤였다면 그런 단선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곳보다 정치판에서는 제일 타협적이어야 합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에는 '공생적 이익'이 '정의'를 우선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심리학자들이 실험한 최후의 통첩게임에서도 1달러만 받아도 이익인 B실험군의 사람들은 자신이 받지 못하더라도 불공정함에 저항하고 받기를 포기했다는 건 아주 유명한 사례입니다. 이재명의 표현대로 그들의 이번의 선별지급에 대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의 분노를 다음선거에서 처절하게 맛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전에 '사건'과 '사고'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단순하지 않은 용어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능력입니다. 엊그제는 '옷'에 대한 정의를 듣고 같은 감탄을 하였습니다. 너는 몸을 가리기 위해서 입고 나는 몸을 보여주기 위해 입는 것. '사건'은 해결해야 하지만 '사고'는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원상으로 되돌린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하수가 역류하면 개수구 부분을 긁어냈을 때 당장은 빠지겠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생길 것이고,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을 부린다고 연락이 오면 봉투를 보내거나 아이를 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벌어지면 그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큰 범주의 것일 때는 그럴 필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렵기도 합니다. 현재 출생률이 걱정스럽게 떨어진다고 보육환경을 개선하고 보육비를 주는 것을 종국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난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소득이 높은 직장에 갈 수 있도록 구조화된 학교의 시스템이 내가 보는 원인 그 하나입니다. 그에 해당되는 분야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학교(시험)성적이 좋다고 일을 더 잘한다고 믿는 기업 운영자는 얼마 없을 것이고 그렇게 믿는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은 성장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시험 성적이 좋아서 명문대 인기학과에 가고 그를 발판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에 가는 게 당연하다고 굳어진 사회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교육의 문제는 아이와 아이에 장차 기댈 자신의 꿈을 일찍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층상승을 기대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출산을 거부합니다.대입 입시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공정하지도 않은 수능성적을 공정하다고 믿고 수능성적이 높은 학생이 대학공부 잘 할 것이라고 믿는 건 무지한 믿음이지만, 이처럼 다수가 믿는 다는 것이 해결가능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대입제도의 개선이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또 하나의 해결책은 어떤 형태로 태어난 아이라도 모두 국가가 부족하지 않게 제도적으로 키워주는 것입니다. 성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부터 가난한 부모를 가진 아이까지 태어난 모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도 출생률을 거의 15%까지 늘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부동산 대책에 대한 문제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정부가 대책을 내어 놓고 있어도 대출을 받아가며 주택을 구입하고 있는 것의 이면은 주택에 대한 개념의 문제입니다. '의식주'의 '집'이 아닌 '재산'의 '물건'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재산'이며 갖지 못한 사람이 힘들게 구하고 있는 것은 '거주공간'인 것으로 이 둘은 같은 사물으로 놓고 완전히 다른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며 '칼'을 두고 '조리도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돈을 갈취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역대 정권들이 부동산 정책을 경제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해 오면서 수요가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거지요. 금리 등 경제의 문제를 부동산에서 떼어내고 '집'을 '거주지'로 명시하고 보유세를 매기면 됩니다. 최근의 감염병 문제입니다. 전염병은 단순합니다. 모여 사는 것과 이동의 문제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된 것은 상업적인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장소를 띄엄띄엄 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동하는 것은 스스로 억제할 수 있습니다. '지 발 달려 지가 돌아다는 걸 어떻하겠냐'는 건 어렸을 때 나가서 다쳐 온다든지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온다든지 하면 개에 견주어 가며 듣던 말이었습니다. 돌아다니지 않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병이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주무부서는 이동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부와 매스컴은 괘념치 않고 여행을 장려합니다. 모여 살아도 이동하지 않는다면 지역내에서 다 죽고 다른 지역으로의 전이는 없는데 지들 표현으로 '힐링'을 다른 지역에서 찾으면서 생기는 일이라는 건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에는 눈감고 다른 희생양을 교회모임에서 찾습니다. 교회를 갔더라도 감염자가 다른 곳에 가지 않앗으면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면을 보지 않고 그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가계의 대출이 그것도 신용대출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심각한 국가경제 붕괴의 뇌관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저금리도 아닌 제로금리 때문 아닙니까. 2% 이자로 돈을 꾸어다 4%만 이익을 내도 이익이니까 다들 빚을 내어 집을 사고 주식을 사는 건데 금리 올리면 되잖아요. 그러면 기업이 운영에 타격을 입는다고요? 아, 국민 위한다고 말만 하고 국민은 폭탄을 떠안고 있는데 기업만 살리려고 하잖아요? 기업이 살아야 국가경제가 살고 그래야 국민도 산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기업이 잘 풀린다고 국민이 그 혜택을 본다는 그 거짓말은 언젯적 것인가요?

2020년 9월 3일 목요일

붕당(사색당파)

조선 전기 국가 성립과 이후 세조의 쿠데타 공신들인 훈구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자 그 동안 훈구와 대립시키기 위해 길러왔던 사림들이 힘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싸웁니다. 물론 유교적이라거나 전통이라거나 그런 가치를 앞에 세우는 사람들과 똑같이 항상 명분을 앞에 세우지만 속내는 재산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앞의 훈구와 사림의 싸움이 사화로 나타났고 이후 사림들의 싸움을 동, 서, 남, 북 사색당파라고도 하고 붕당이라고도 합니다. 붕당은 붕이 朋이기 때문에 좋은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고 앞의 표현은 깎아 내리기 위한 표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정리했습니다.

2020년 9월 2일 수요일

옛날

어렸을 대 살았던 곳을 가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 큰 줄 알았었는데 정말 작았었네? 10대의 초반까지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목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도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그를 김집사라고 불렀고 교회가 없고 마을 공회당을 썼습니다. 그 마을은 주변의 중심마을이었고 내가 산 마을은 변두리 작은 마을이어서 밤예배를 보고 돌아오는 때는 많이 무서웠습니다. 두 마을 사이에 언덕배기를 가로질러 깎아 만든 길이 있어서 협곡을 자나는 느낌인데 그 언덕 위에는 핏빛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른들 말을 종합해서 내가 배운 역사지식을 결합해 보면 전쟁 전에 보련 관련 사람들을 한 번, 그리고 전쟁 때 저쪽과 관련이 있다고 부역자로 몰린 사람들 또 한 번 집단 처형을 한 곳이 그 언덕 위였습니다. 죽을 사람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고 줄을 세운 뒤 죽창으로 찔러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게 한 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매장했다고 어른들이 그랬고 흐린 날이면 퍼런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그 길을 밤에 지나올 때면 길이 좁아서 한 줄로 지나는데 앞은 앞대로 뒤는 뒤대로 가운데는 가운데대로 무서워서 찬송가를 크게 부르며 정신없이 뛰어 지나갔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뒤 아버지 돌아가시고 찾은 그 곳은 어른이 된 내 키 정도의 높이일 뿐이었습니다. 낭도에서의 삶은 단조로웠지만 살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뒤집을만큼 힘들게 했던 것이 물부족이었습니다. 지하수에 염분이 나오기 때문에 산에 저수지에 물을 담아서 전체가 그걸 식수로 썼습니다. 강수량이 적은 겨울이 문제였습니다. 들어간 이태째는 유난히 겨울가뭄이 심해서 재한급수가 극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몇 주째 계속되면서 많이 힘들었고 갈등이 만들어졌습니다. 관공서, 그러니까 동사무소 출장소, 파출소 출장소, 보건지소와 농협을 물공급을 해주는데 선생인 난 혜택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5명이 한 가족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그 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네 청년들과 다툼이 벌어졌고 관공서도 아닌 농협도 주면서 선생은 안 주는 게 맞냐는 말에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이 돌아왔고 난 학교를 무시하면 학교가 없어지게 되고 학교가 없어지면 아이를 가진 젊은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 섬은 죽는다고 말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습니다. 난 정나미가 떨어져 바로 3월 발령으로 나와 버렸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폐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고흥과 화양을 잇는 다리가 열렸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다 늙은이들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외지인들이었습니다. 살았던 집을 찾아 보았습니다. 내가 들어갈 때 여러 해 동안 쓰지 않았던 집이라 폐가 수준이었는데 내 돈으로 고쳐고 청소해서 두 채를 썼습니다. 한 채는 어머니 방과 보일러실, 다른 채는 아내와 아이들 넷.
정면이 어머니 방, 오른쪽 풀밭이 네 식구 살던 곳이었는데 그 곳은 깨끗이 치워지고 풀밭이 되었네요. 어떻게 저 좁은 곳에 집이 있었고 그 식구들이 살았었을까요.

2020년 8월 25일 화요일

번개

태풍 바비가 온다고 하던 중 어젯밤 산책 나갔다 들어 오는데 번개가 치는데 장관이었습니다.
관사에 가려져 피해 나와서 바닷가에서 찍었습니다. 깜빡거리는 불빛은 화태 대교이고 앞을 가리고 있는 산은 화태입니다. 방향으로 봐서 번개는 금오도 방향입니다. 소리가 아주 약한 것을 보면 금오도는 아니고 훨씬 먼 곳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도를 검색해 보니 그 방향으로는 금오도 넘어 안도, 그리고 연도 뿐이네요.

행복

행복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글을 전에 썼습니다.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요. 대부분 물질적으로 불편하지 않는 소비생활과 마음의 평온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추려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보면 그렇게 정리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질의 문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에 의해 만족하는 상황이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조건이 주어졌다고 합시다. 전원생활을 꿈꾸며 자리한 사람들은 벌레와 풀과 흙먼지를 해결해 줄 일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할 것이며 그게 해결되고 나면 장보고 음식조리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며 내 건강을 관리해주는 의사가 필요해질 것이고 비가 와도 운동하거나 놀거나 산책할 수 있는 강당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리적인 욕심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필요한 조건은 그리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주어진 다음에 단계적으로 지속적으로 더 필요한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심리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걸 바란다는 자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내 평정심을 건드리니 이혼하고 난 뒤에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여자친구(기옥력이 부족하면 아내가 될)을 필요로 할 것이고 사로 사귄 그가 앞의 아내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행동일 것이기에. 어떤 경우의 행복이거나 그것을 깊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행복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나 행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색즉시공이며 피안에 이르려면 버려야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자 한다면 위의 예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반드시 정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불행하게 하는 행복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20년 8월 24일 월요일

도시락

지금은 도시락의 개념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쓰는 사람이 있더라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의 그 도시락은 아닌 것이구요. 그 때의 도시락을 볼 수 없었는데 얼마 전 한 카페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썼던 것은 그 도시락 나오기 전의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직육면체 양은 그릇에 노락 물을 입힌 것이었고 이건 모양도 세련되었고 색깔도 흰색으로 입힌 것입니다.

도로원표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는데 도로원표 이야기를 추가로 합니다. 각 지역간 거리를 정하기 위해 각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에 도로 원표를 설치하고 그 지점이 그 지역의 거리측정의 기점(종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보니까 그 자리에 삼각대 위에 어떤 장비가 얹혀 있는 겁니다. 며칠간 계속 있었는데 아마 인공위성과 GPS를 통해 위치를 정치시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배구 놀이

원바운드 하나만 허용합니다. 해보지 않은 모르는 사람들은 손으로 하는 운동이니까 배구가 쉬운 운동인 줄 알지만 막상 해보면 배드민턴보다 어려운 운동이란 걸 알게 됩니다. 배구를 가르칠 때도 그걸 염두에 두지 않은 교사들은 학생들이 배구를 싫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배우는 데엔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를 잘 만들어주고 가르치는 게 능력입니다. 그 첫번째는 당연히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수학공부와는 다릅니다. 요새 수학교육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학공부를 재미있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초등학교에 한하는 것이고 중학교 이후는 통하지 않습니다. 배구의 재미는 캐치볼과 더블컨택을 무시하고 원바운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재미있어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원바운드를 하나만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편은 바운드 하지 말자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원래의 배구 경기가 됩니다. 그 때부터 터치넷, 캐치볼, 더블컨택을 하나씩 가르쳐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긴 학생 수도 적을 뿐더러 3학년 아이들이 운동하러 나오지 않아서 몸이 불편한 한 아이를 뺀1, 2학년 10명이 하는데 남녀 대결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원바운드 하나씩 허용하는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제 개학해서 첫시간인 2학년 아이들이 6교시에 놀자고 교무실 복도에서 시위를 해서 져주었습니다. 농구 10분 하고 배구로. 몸이 불편한 아이가 찍어 주기로 하고.

2020년 8월 16일 일요일

타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

잘 나가고 있던 집권당의 그것도 유력한 당권주자들이 연거푸 이성에 대한 위법한 행위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는 전혀 아니지만 스스로 진보적이고 청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정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럴진데 매스컴에 나오지 않는다고 저 정체도 모르는 이상한 놈들이 모여 있는 붉은자주색 정당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당의 추종자들만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정체도 모른다는 건 '사유재산 행사의 자유'와 일반이 나누어 가져야 할 공공성이 가장 중요한 주택의 '소유'가 아닌 '주거'의 개념도 분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둘? 아니 정말 간결한 것은 스스로 보수라고 내어놓고 말하는(실은 수구에 불과한 건데) 그 당을 민주당보다 더 왼편에 놓고자 하는 비대위원이 있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거의 사이코같은 이들의 정당이니 이 정도의 표현은 젊잖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고 흔히 표현하는 '기성세대'의 남자들이, 그것도 운동권(그들이 몸담을 때 제일 중요한 태도는 깨끗함이었던)을 거쳐온 사람들이 그런 대중의 동의를 얻기는 커녕 비난을 들을 행동을 했다는 것을 교육자의 눈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교사들, 그 중에서도 남교사들이 학생들이 하는 말 중 제일 싫어하는 것이 '왜요?'입니다. 무식한데 유식한 체하는 교사들은 그렇게 묻는 학생들에게 '왜요'란 한자로 '일본 이불'인데 그게 어떻다는 거냐고 되물으며 힘을 주어 쥐어박을 정도로 듣기 싫어 합니다. 여기에는 많이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과거 내가 어린 시절에는 어른도 그랬지만 교사들이 내린 지시에 시행햐 하는 이유를 묻는 학생들에게 '말 많은 놈은 다 공산당이야'라며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지난 과오를 덮기 위해 미군을 등에 엎고 당시 세상평등을 가져 오기 위해 사회주의로 무장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people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을 뒤덮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 낸 혐오의 말 '빨갱이' 사냥을 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 대드는 이들에게 몽둥이와 고문, 그리고 생명박탈을 하며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른들과 교사들이 그대로 배워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왜요와 공산당)은 학생들이 그 지시를 왜 따라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효울성을 앞세워 무력으로 억지로 가르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사들이 그랬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민주'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선배들, 내 또래들이 군대까지 거치며 윗 세대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강요해온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현장에서 여전합니다.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은 어김없이 그렇게 합니다. 다녀오지 않은 남자들은 감추기 위해 더 독하게 하구요. 여교사라고 다를 것도 없습니다. 윽박질러 빠르게 원하는 결과(질서)를 얻기 위해 이 수단을 유용하게 써왔는데 세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학생들의 인권이 화두에 오른 게 아니라 법적으로 보장이 된 것입니다. 보통은 다중이 원해서 법규를 바꾸게 되는데 이건 '올바른 교육을 위해' 학생들을 훈육해왔던 교사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아니고 위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툭하면 남자중학교에는 경찰차가 들어와 교사들을 심문하고 갑니다. 그나마 일의 당사자들이 촉법자를 면하는 것은 경찰들이 아직 그 법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교사들은 집단적으로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 자신들의 권리를 위축시키는 적대적인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속적이고 전문적인 상담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어떤 시스템과 교사에 대한 교육도 없이 지켜야 하는 법규만 교사들에게 주고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당연히 생기게 된 현실입니다. 학생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해를 시키며 가르쳐야 했던 일이었고 교사들에게도 인권이 무엇인지, 학생의 인권이 무엇인지, 상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교사를 수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무와 학생 생활지도의 부담을 선행적으로 덜어내야 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것도 동일한 차원의 것입니다. 사회적인 합의가 없이 무슨 수학도 아닌데 연역법처럼 응당 사람이라면 해야 하는 바른 행동으로 규범을 제시하고 그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환경이 된 것입니다. 내내 회식문회가 성했고 나이든 선배들은 젊은 여성과 젊은 남성이 술을 따르도록 하고 이차로 노래방까지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던 게 몸에 밴 이들이 갑자기 강요된 법에 대드는 것은 예견된 일이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젊은 세대들이 선배들을 기피하면서 회식문화 자체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수요일마다 친목운동(즈로 배구)도 없어지고. 이런 개별문화가 나쁜 것 아니지만 문제는 협력을 통한 더 나은 교육활동이 아예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고 지금이라도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현실에 맞게 해당자들에게 섬세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규문을 읽는 형식적인 연수를 하는 건 더 거부감만을 키우게 되고 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아예 말조차 섞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더 이상 번져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피가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보지 않도록.

2020년 7월 30일 목요일

맹자의 仁

  제의 선왕 齊宣王 이야기입니다.
  흔종의식(씨뿌리는 행사인가 봅니다)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왕이 '소가 불쌍하니' '양으로 바꾸라'고 했답니다. 맹자가 그 일에 대해 묻자 "사람들이 째째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당장은 소가 불쌍해서 그랬노라"고 답합니다.
  맹자가 답하기를 그것이 '仁'이라고 합니다.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는 보이지만 양은 보이지 않는 게 그 이유라고 합니다.
  맹자의 '인'이 눈곱만큼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조삼모사 같기도 하고 영화 '미션'의 본 이야기인 광산 노예를 쓰기 위해 '원주민'이 인간이냐는 물음에 가톨릭이 공회를 열어 '원주민은 인간'이라고 답하니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데려와 썼다는 것과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겠지요?

2020년 7월 29일 수요일

남을 인식하는 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뒷 사람에게 문의 손잡이를 인계하는 것, 문을 닫을 때 놓아버리거나 힘을 주지 않고 닫힐 때까지 힘을 주어 조용히 닫히게 하는 것, 신발을 신발장 빈 칸을 찾아 넣고 들어 오는 것, 자신이 선택한 식탁에 앉기 전에 방석을 조심히 놓는 것, 옆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말하는 것 등 식당에서의 이런 행동은 배려가 아니고 예의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예의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배려'는 한참 수준 높은, 도달하기 어려운 가치입니다. 
  관사 2층과 3층은 상당히 넓은 발코니가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가려져 있는 거지요. 그런데 1층은 바로 밖이고 거기에 지붕 두른 벤치와 탁자를 두 동 세워놓았습니다. 여러 놈들이 이따금 숯불 피워 고기도 구워먹고 실습 양식장에서 광어 훔쳐다 회썰어 먹습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방안이 보이고 바로 옆이니 술먹고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립니다. 지들이 사는 2층이나 3층 발코니가 더 주변 경치가 좋은데 남의 공간을 그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관사 옆에 수영장을 짓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그 공간을 사용합니다. 내 방의 처마 밑에 압착스티로폼을 깔고 해를 피해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비가 많아지면서 밤에 고양이들이 그 공간을 쓰더니 똥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떨어지는 곳까지 밀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퇴근하고 보니 다시 원래의 자리에 똥을 그대로 둔 채 밀어 놓았습니다.그래서 아예 길의 반대편까지 밀어놓았습니다. 알아 먹었나 모르겠습니다. 작은 스티로폼 몇 개를 그 위에 올려 놓은 것이 배게로 쓰려고 한지 모르겠으나 다시 아침에 보니 털뭉치가 보여 밥을 먹으며 계속 살펴 보니 새끼 고양이 입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주 미약하지만 움직입니다. 까마귀가 한참을 맴돌더니 움직임을 감지했는지 떠나났습니다.


이별하기 좋은 날은 언제일까요?

코요태의 '애심' 가사입니다.

햇볕이 쨍쨍째던 날에
내곁을 떠나주길 바래
눈물이 빨리 말라 좋은 날에
제발 우리 헤어져

그리고 Ref의 '이별공식'입니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 해봤니
비오는 날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수가 없잖아

  며칠 전 방송 어디에선가 알이에프 가사를 이야기하길래 동시에 코요태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두 곡의 가사를 따내어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댄스곡의 가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시인 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겁니다.일 주일 넘게 두 노래의 이 부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별하기 좋은 날이 있을까요?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그(들)의 진보

  난 정치하는 사람들이 '진보'라고 말하는 것과 내 생각이 왜 괴리가 큰 지, 어디서부터인지 몰랐습니다. 오늘 한겨레 논설위원 박찬수의 글을 보고서 이젠 알겠습니다.
  노 전대통령의 진보에 대한 개념이 정치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진보'의 개념이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결합니다. 그가 추구하고 현실화한 정책들만 보면 됩니다.
  정리해고, 구조조정, 민영화, 개방.
자신이 설명한 내용은 시장친화적인 진보, 개방지향의 진보, 배타하지 않는 자주를 주장하는 실용적 진보입니다.
  '정통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자'라고 했고 자신은 그런 평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무식한 생각이고 왜 자신의 방향에 끝에 '진보'를 붙였는지 무지무지 억지스럽습니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나 저 건너편에 있는 놈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처럼 전혀 말이 성립할 수 없는 생각을 하였고 그걸 책으로 썼습니다. 그의 생각이 '진보'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건 의미가 없고 그가 시행했던 정책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표본이었습니다.

지금 핀 꽃

    꽃이 두 가지 입니다. 잎사귀 넓은 건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닌 말똥풀이고 꽃은 꽃잎이 많은 게 민들레, 가지런하게 한 줄만 있는 게 좀씀바귀입니다. 쪼꼬만 게 화단에 많이 피어 있어 궁금해서 찾아보니 씀바귀와 같은 모양인데 아주 작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