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거나 새로운 것이 머릿속으로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오는 걸 두려워 합니다. 자신의 과거가 부정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거든요.
예전에 사람들이 나이에 따라 의존하거나 신뢰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스개가 있었습니다.어릴 땐 서로 싸울 때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로 시작하며 덤볐고 초등학교 때는 '우리 선생님이 그랬는데'로, 중학생이 되면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로 바뀌다가 고등학생이 되면 '친구 아무개가 그랬는데'가 되더니 대학생이 되면서 '내가 생각해보니'로 바뀐다고 했습니다. 결론이 나오지 않은 것 같지요? 학교 나와서 취직을 하고 몇 년이 지나면 '누가 그러던데'로 바뀐답니다. 나는 없어지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가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남 사람으로 보인다는 씁쓸한 이야기.
난 그 대학 때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을 항상 들었습니다. 저녁에 남왕이나 경원이 자취방에 모여서 한잔 하며 말다툼이 벌어지면 나는 논리나 사실에 문제가 없는 쪽의 이야기에는 수긍을 항상 하였습니다. 술 마시고 배운것도 별루고 세상도 별로 알지 못하면서 혈기만 넘치는 대학생들이 주장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라고. 싸우는 놈들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내게 '줏대가 없는 놈'이라고 양쪽 다 욕을 했습니다. 새로운 싱싱한 표적.
이집트의 피라밋 건축을 하면서 노예노동을 시킨 게 아니라 임금을 주면서 일을 시켰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세계사를 읽으면서 임금만 준 게 아니라 맥주도 주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습니다. 햐! 노동주, 멋있다! 그런데 그 맥주가 물 대신 준 거였다는 것에 또 놀랐습니다. 아프리카, 유럽 모두 물이 깨끗하지 못해 물을 바로 마시지 못하고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다른 걸쭉한 무른 죽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맥주 한 병을 종일 마시는 게 그런 수분섭취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놀랐던 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젊은 시절에는 꽤 의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소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냥 소설일 뿐이지만. 그 소설의 시작에서 유비가 가보로 내려오는 보검을 어머니가 차를 좋아한다고 차로 바꾸는 장면이 나오는데 감동이었고 차가 그렇게 비싼 가격이었으며 중국인들은 그래도 차를 사랑한다고 감동을 했습니다. 아마 중국은 몰라도 한국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걸요? 거의 유일한 생산국이었으면서도 차 가격이 비쌌다는 것과 중국인들의 생활에 항상 차가 있었다는 것에.
그런데 어제 책을 읽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항상 차를 마신 것도 그들의 물이 깨끗하지 않아서겠구나. 그들의 주된 세력지가 북쪽인데 황하가 그들의 생활을 주도하는 강이니 물이 어디에서나 깨끗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 이름이 우리는 '서해'지만 그들은 '황해'잖아. 항상 황하의 탁한 황톳물이 흘러들어 물이 들었으니 누런 바다, 황해. 그러니 깨끗한 물을 마시기 위해 차를 물 대신 항상 끓여 먹었다. 와, 이거다! 내 주장이지만 근사하다. 짜릿했습니다.
* 곁가지일 수 있지만 차를 항상 그렇게 마신다는 게 건강에 해로울 건데 항상 마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차는 서양인들 관점에서는 카페인이 문제이겠지만 우리는 차를 아주 찬 음식으로 분류합니다. 발효를 시키면 살짝 따뜻한 쪽으로 바뀌는. 그래서 위와 장이 찬 사람들은 녹차를 조금만 마셔도 바로 장과 손발이 반응을 합니다. 그걸 계속 마신다는 건 엄청난 열성 체질이 아니면 정신도 바르지 않고 설사가 계속 나오는 상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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