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된 배경 : 선조 때 관리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임명권을 두고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이 갈라섬. 신의겸과 김효원의 집의 위치를 기준으로 동, 서로 나뉨.
2. 이념적 뿌리
3. 갈등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동인으로 가면서 갈등이 커짐
4. 갈등의 증폭
정여립을 모반사건으로 누명을 씌워 동인 천여명을 죽임.
(정철이 판관이었고 아주 잔인하였으며 이 때 호남의 인물을 거의 죽었음)
선조는 임란 후 광해군에 쏠린 인기를 알고 세자책봉을 하지 않고 공론화를 금지한다. 서인의 영수급인 정철이 세자책봉을 공론화하려 하자 귀양. 이를 두고 강경파(북인)와 온건파(남인)로 동인이 나뉘어짐. 북인은 임란 때 의병.
6. 새로운 구도로 변화
광해군을 쿠데타로 서인 주도 남인 참여로 인조반정 성공. 북인은 귀향
현종 때 두 번의 예송논쟁이 있었음.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 지가 1차 예송논쟁.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첫째는 소현)이어서 1년, 남인은 왕이 죽었으니 3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요종의 비인 인선왕후 사후 서인은 자의대비 상복 9개월, 남인은 1년을 주장. 자의대비가 인조에게 올 때 어린 나이여서 불거진 일. 표면적으로는 권력싸움이 아니라 왕을 사대부의 예에 따를 것인지 왕은 사대부와 다른 것인지가 대두되었고, 남인의 입장이 왕권을 강화하는 쪽이어서 남인이 집권하고 서인이 축출됨.
7. 세 번의 환국換局
8. 새로운 분파
이 때 서인은 강경파이면서 사회적 안정을 주장하는 노론과, 온건파이면서 개혁, 북방개척을 주장하는 소론으로 나뉨.
장소의가 아들 윤을 낳아 원자로 삼고 희빈으로 책봉하려 했으나 노론들이 반대하였으나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고 희빈으로 책봉. 송시열이 송나라 예를 들어 시기가 아님을 상소. 인현왕후 민씨 폐출. 노론 축출.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희빈이 왕비가 됨. 송시열 유배, 사사.
인현왕후 복권 소론과 노론 집권.
남인 재기불능. 낙향. 중농주의
이후 장소의 아들 윤이 경종, 숙빈 최씨 아들이 나중에 영조인 연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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