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6

유가의 민낯

   먼저 유가儒家와 유교儒敎를 정의합니다. 보통은 유교를 유학과 동일시 하고 유교를 믿고 공부하는 이들의 집단을 유가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공부한 사람들은 유학과 유교를 구분합니다. 유학은 학문 그 자체를 말하고 유교는 유학에서 형식을 중요시하여 종교화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유학자와 유가가 구분이 됩니다.

  유儒의 뜻은 '선비'이지만 원래 갑골문에서는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의 형상이었고 곧 제사장의 의미했습니다. 그걸 가져다 쓴 것이고 유학의 시조인 공자를 보면 어려서부터 제사상 차리는 것을 또래들이 골목에서 올 때 혼자서 항상 했답니다. 그가 가장 높이 생각했던 것이 "예기"인데 그 책을 참고 읽느라 결국은 입 밖으로 까지 여러 번 욕이 새어 나온 뒤 절반 조금 더 읽고 아예 책을 버려버렸습니다.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는 벼슬이 어떤 사람은 어떤 차림으로 어떻게 서고 행동해야 하며 어떤 행사는 누구는 뭘 하고 행사장은 어떻게 꾸미고. 이런 것들이 아주 꼼꼼하게 씌어 있는 책입니다.

  공자의 나라 노나라는 주나라 서백창(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웠고 3대 성왕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대리청정을 하다 성인이 되어 물려주어 대대로 중국, 유학자들에게 칭송을 받는 인물로 보통 노나라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주공의 큰아들을 봉한 것으로 압니다. 노나라는 작기도 하고 뭐 농산물도 특산물도 별로 생산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공, 혹은 그의 아들이 봉해진 나라라서 주나라의 예법(주례)가 주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탓에 다른 나라들에서 노나라에 와서 주례를 배워갔답니다.

  바로 이것이 유학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치국의 도리라며 자신을 써달라며 나라들을 돌아다녔으니(노나라를 먹을 게 없으니) 누가 그를 중용하려 했겠습니까. 멋있기는 하지만 잘 살게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을 것 아닙니까.

    그게 더 망가진 게 성리학 입니다. 송나라 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사마광 기억 날까요? 이른바 복의濮議은 끝내주는 일이었습니다. 4대 황제 인종이 후대가 없어 사촌형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한 게 영종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건 영종의 친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지 큰아버지라 불러야 하는지로 두 당파로 나누어 상대를 '소인'이라 욕하며 아주 심하게 싸웠습니다. 그것이 당파를 가르고 집권을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게 조선 후기 예송논쟁에서 판박이로 벌어집니다. 여튼 그런 성리학을 아주 더 사람들의 사는 것에서 동떨어지게 성리학을 완성한 사람이 유학자들이 중시조로 떠받드는 사람이 '주희(높여 부르길 주자'입니다.

  저게 전통이라고 따르자는 사람들은 사람일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맹감

    이 땅의 모든 권력은 경상도가 점하고 있는데 사투리마저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생각 나는 대로 하나씩 우리 사투리, 우리말을 기록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맹감입니다. 표준말로는 청미래덩굴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는 망개인데 지금 오로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