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1일 목요일

협업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한 고민과 기업가 정신 등을 생각해 보라고 브랜드 네임 자료를 도서실 게시판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은경이가 기업로고를 그렸습니다.
 
 














협업자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제목 글씨와 내용 요약은 내가 은경이가 로고 그림, 내용 글씨는 예인.




  7월 10일 작업



  9월21일 작업
11월 작업

12월 작업

2018년 5월 27일 일요일

파티

  파티가 별건가요. 한잔 할 사람 모이자고 했는데 교무만 빼고 다 모였습니다. 과자, 술, 과일 등 집에 있는 거 다 가지고 늦도록 놀았습니다. 나대거나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들 모이는 자리는 즐겁습니다.

나의 자식

  내가 받은 밥상머리 교육은 엄격했습니다. 그릇을 들고 먹어서는 안 되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서도 안 되며 숫가락이나 젓가락을 밥그릇 위에 올려 놓아서도, ...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중국이나 일본, 절에서 하는 식사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밥그릇을 들고 입에 댄 뒤 젓가락으로 긁어 넣어 먹잖아요. 성환씨 딸들은 보지도 않고 데려가도 된다고 인근의 여러 면에 퍼져 있던 인식이었습니다. 유학자도 아니시면서 당신 어려서 배운(어머니도) 법도대로 자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내 아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해라 하지 말아라고 강요한 적도 없고 일방적인 충고도 한 적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제안정도는 했습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데 네 선택은 어떻게 할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엄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둘 다 말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도 그냥 그낌이 그렇답니다.
  억울한 것이 둘째가 작년에 한 학기도 아니고 일 년을 휴학할 때 사전 양해도, 협의도 없이 엄마와 알아서 결정하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습니다. 큰 놈은 작년에 여수로 내려온다는 통보에 오면 문제가 되는 이유를 제시하고 내려오지 않는게 좋겠다고 내 의견을 분명히 했는대도 통보 다음날 내려와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을 하고 있는지 반 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아버지를 보고 배우는 것 중 하나가 면도입니다. 배워야 하며 기구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면도날은 몇 안 되는 남자들의 취향에 따른 선택을 하는 물건입니다. 난 쉬크를 내내 쓰고 있는데 둘째는 질렛 첫째는 질렛 갔다가 지금은 쉬크. 그래서 억울하다는 겁니다. 뭐가 엄하다는 건지.

2018년 5월 22일 화요일

해석의 문제

子曰 吾 十有五而志于學하고,
자왈 오 십유오이지우학하고,

三十而立하고,
삼십이립하고,

四十而不惑하고,
사십이불혹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오십이지천명하고,

六十而耳順하고,
육십이이순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여 不踰矩니라.
칠십이종심소욕하여 불유구니라.
 
공자 말씀이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스스로 섰고, 마흔에는 마음에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 귀가 순했고,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삼십에 '이립'했다는 말은 여러 부분에서 자립했다고 해석하면 됩니다. 예순에 '이순'했다는 말은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석하면 될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해석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그런 성취를 했다고 다름 사람들에게 떠들었다면 그건 오만이 아닌가요. 삼십살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사십에 불혹했다구요? 권력을 얻기 위해 천하를 주유해서 '상갓집의 개'라는 별명까지 있었던 그가 자신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구요? 믿어야 하는 거지요? 세계 4대 성인이신데.
  실은 그걸 말하려 한 게 아니고 우리 장삼이사들의 해석을 경계하려 합니다.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런 경지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학문에 힘써야 한다는 건데 '내 나이 오십대 지천명인데'라며 나이들면 자연히 그 경지에 도달한 줄 아는 사람들에 대한 겁니다. 공자같은 분이나 가능한 학문(인생)의 도달점입니다.

  참고로 나이의 다른 이름 몇 가지.
과년 瓜年 : 오이와는 상관이 없고 瓜자를 파자하면 八八이 되어서 8+8=16세. 혼기에 이른 여자.
방년 芳年 : 20세 전후의 꽃다운 나이.
약관 弱冠 : 갓을 쓰는 나이. 20세의 남자.
환갑 還甲 : 갑자가 다시 돌아옴. 61세.
진갑 進甲 : 갑자가 다시 시작됨. 62세.
망팔 望八 : 팔십을 바라봄. 71세.
산수 傘壽 : 80세. 八자를 우산으로 비유했나 봅니다.
향년 享年 : 죽은 사람 부고 낼 때.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이니 조류독감이니 뭐니 어마어마하게 겁을 주고 떠났거나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전염병들이 있습니다. 호들갑을 떨고 겁을 먹은 것에 비하면 피해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위험한 걸까요? '에이즈는 없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세먼지입니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게 그렇게 위험한 게 맞나요 입니다. 집에서는 공기청정기 사고 마스크 씌우고 준비를 하는데 학교에서는 도대체 뭔 대책이 있냐고 대놓고 항의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이 하고 있는 걸 소개합니다. 공기청정기를 3대 돌리고 있다는사람에게 몇 시간쯤 돌리냐고 물으니 오히려 반문합니다.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런데 쇼가 아니라 심각하게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어 24시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이 가관입니다. 창문틈으로도 들어오니까 틈은 전부 테이핑 한답니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입자가 작아서 작은 틈새로 들어오는 걸 막는다면 공기는 어디로 들어올까요. 현관문 열 때 들어온 그 조금을 가지고 내내 마시는 걸까요. 산소발생기는 쓰지 않으니 공기 중의 산소 농도는 상당히 희박하겠잖아요. 또 하나의 문제는 전기입니다. 공기청정기를 3대를 돌리느라 전기 소비량이 많아졌을 건데 바로 미세먼지의 가장 큰 원인이 화석연료를 쓰는 화력발전소가 아닙니까. 자신의 집만 안전하면 화력발전소를 더 돌려 미세먼지를 더 많이 발생시켜도 되는 건가요.
  몸에 나쁘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위험하냐는 겁니다. 감기로도 죽을 수 있고 영국의 시인 릴케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잖아요(파상풍). 내가 날마다 한 잔씩 마시는 커피도 먹다 죽을 수 있고 물을 마시다 사레들려 죽을 수도 있으며 하다못해 웃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세력이 불도 피우지 않고 연기만 신나게 피워올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현명한 판단.

2018년 5월 17일 목요일

  학교의 작은 정원에 꽃들이 한창입니다. 모두가 건강합니다.
낮달맞이꽃

노랑꽃창포

돈나무

돌나물(석채)

라벤더

매발톱

백작약

작약

금계국
피라칸타(피라칸서스)

할미꽃(처음에 보라색 고개숙인 꽃으로 피어 그 꽃이 시들면 이렇게 변합니다.)

2018년 5월 15일 화요일

시선

  나를 보는 시선에 대해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소신만을 장조하면서 주위의 눈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에게 독불장군이라고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 자신이 스스로의 과오를 발견하고 자신의 관점을 수정할 일은 없습니다. 물론 주위의 눈치만 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적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생각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인 사실마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니까요. 게다가 근무 환경에 따라 학생과 학부모들의 지향점도 다릅니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내 기준을 유일한 교육의 지표로 삼으면 그런 역할은 인공지능이 대신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칭찬에 매몰되지 않고 비판에 상처받지 않으면 됩니다.
  바이스가 그제 스승의 날에 학생들 편지라고 쓰게 하라고 해서 뭘 그런 쑥스러운 짓을 하냐며 묵살을 했더니 직접 아이들에게 지시를 했나 봅니다. 롤링페이퍼식으로 써서 어제 오후에 주네요. 새한이란 놈은 과감하지요?

2018년 5월 13일 일요일

화를 어떻게 다스릴까

  사람들의 큰 고민 중 하나는 화가 났을 때 화를 내는 것이 건강에 좋은지 참는 것이 좋은지의 것입니다. 어제 집사부에서 법륜의 답은 신기神氣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눈치만 백단인 점쟁이가 내담자에 깔맞춤식 답변을 하는 바로 그것과 같았습니다.
  화가 난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전적으로는 (火) 몹시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내다'와 '난다'는 차이가 큽니다.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화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저잣거리로 내려와서 어떤 게 건강에 이로울까요. 보통 사람들이 바라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압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에 눌리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유치하게 풀어 봅니다. 물리적으로 압력을 받을 때 찬물을 부으면 움추려 드는 것이고 그건 응어리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또다른 방법으로 화를 표출하는 것은 순간 터뜨리는 것이고 서서히 삭이는 것은 팽창한 풍선에 실구멍을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한 것이 적절하다면 첫 번째는 피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도 우리 상식적인 점과 같이 해석을 합니다. 응어리는 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중 어느 것이 낫느냐는 것인데 두 번째의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장점은 있습니다. 다음에 같은 걸로 건드리는 걸 주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바이스같은 이들은 한두 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요.
  서서히 압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방법입니다. 자신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자신이 원치 않았더라도 파생하는지를 반드시 인식시켜 주든지 한비자의 방법을 쓰든지 해야 하니까요. 나는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악당을 그냥 둘 수 없으니까요.

나의 민주주의 지수는?

  어제 교육방송의 선거제도에 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보다가 민주주의 지수란 걸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해보고 싶었다는 거죠. 오늘 빈 시간에 뒤져 보았더니 어제 보았던 자료와 달리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조사한 것이고 거기는 인터넷판도 유료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어 다른 여러 곳을 뒤졌습니다.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와 “정체 IV ( Polity IV), “벤하넨 민주주의 지수(Vanhanen’s Index of Democracy)”,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 등 네 가지가 알려져 있답니다. 민주주의건 자유건 상당이 실제 상황에 접근하긴 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답니다. 작년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2016년 24위(7.92점)보다 올라서 20(8.00점)입니다. 점수가 8점이 넘어야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는데 2017년도 '결함있는 민주주의'를 시현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2017년 그 난리통에 그 점수가 나왔다는 게 신기하지요? 참고로 미국은 양 해 둘 다 21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일치하지는 않지만'이라는 전제를 달았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지수를 측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부에서 보는 것과 외부에서 보는 것이 차이가 있구요. 방송에서는 길에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현재의 정치에 몇 점을 주겠느냐와 자신의 유권자로서의 점수는 몇 점을 주겠냐고 묻습니다. 이 땅의 길거리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앞의 질문에는 50점 이하로, 자신의 점수는 그보다 훨씬 후하게 줍니다. 나이 들수록 현 정치에 불만이 많고 자신에게는 후하여 두 점수 사이의 차이가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벌어집니다.
  이 점이 내가 생각을 하는 지점인 것입니다. 현 정치의 문제는 현재 정치인들의 현주소이자 그들을 뽑은 유권자의 인식과 행동의 현재인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세 가지는 시간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일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이 뽑은 사람이 그 짓을 하고 있지만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을 비판하면서도  이번에도 똑같이 그래도 그 놈이 낫다며 똑같은 선거 행위를 하고서는 자신의 행위는 올바르다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르신은 자신의 유권자로서의 활동에 95점을 주다가 왜 100점은 주지 않냐고 인터뷰이가 말하니까 당연히 100점을 줘야 한다고 고쳐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외모나 능력 등에서 평균은 된다고 하는 그 이론에서 나오나 봅니다.

잘 살고 있을까?

  태양계의 행성이 일렬로 서면 지구에 핵이 요동치면서 엄청난 지각변동으로 인류멸망의 재앙을 맞게 된다는 마야인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화 2012를 어제 교육방송을 통해 한 번 더 보았습니다.
  이런 영화를 보면두 가지 고민하는 게 생깁니다. 하나는 생존할 수 있는 수가 한정적일 때 누가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아주 오래 된 007 문레이커에서 그런 고민을 처음 만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내남 할것없이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한다면 인위적으로 멸망시키고 초기화된 땅에서 새로 문명을 만들어가는 것을 그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까요? 단지 자신이 그(생존자)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인 거지요. 물론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부터 반대하겠지만. 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어야하는데 인류의 큰 전쟁은 대부분 그들이 벌인 일입니다.
  또 하나의 고민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면 좋은 건지에 대한 것입니다. 2012에서 착한 역으로 나오는 사람은 미리 알아야 미처 하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고 나쁜 역으로 나오는 사람은 어차피 죽을 사람 모르고 죽는 게 낫다는 관점입니다. 살 수 있는 티켓을 여분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매 걸린 팔순 노모는 태우지 않습니다. 더 필요한 사람이 살아야 한다며. 어떻습니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생각과 행동, 어느 쪽이 자신의 선택과 같습니까?
  '착한 사람'은 종교적인 의미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 별 거 아닌 갈등으로 연락하지 않고 살았던, 혹은 표현에 서툴러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가까웠어야 할 사람들에게 인사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지오디)의 부름으로 훨씬 좋은 '천국'에 가서 살게 되었으니 촉복해줘야 할 일입니다. 이승에서 하지 못한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영적으로 해소할 수 있습니다.
  버킷리스트도 같은 맥락입니다. 살면서 열심히 산 사람에게 꼭해야 할 일을 미루어 두는 건 없습니다. 설령 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더라도 떠난 마당에 아쉬워 할 거란 뭐람? 죽음은 단절입니다. 아쉬움을 두고 떠나서 께름칙한 건 내세를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비합리적인 그냥 상상일 뿐입니다. 가스불에 찌개를 올려놓았는데 죽으면서 그게 폭발해서 집이 날아가는 것을 생각할 일이라면 그건 다른 문제겠지만.

2018년 5월 7일 월요일

몰랐던 사실

  며칠 전 주ㄱ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깜짝 놀랐습니다. 수학 공부한다는 사람이 무심결에 놓친 중요한 오산. 보통 사람들이 50%올랐다 50% 내리면 본전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산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생각해보니 소름이 돋는 겁니다.
  10,000인 것이 50%오르면 15,000원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50%내리면 7,500원 빠지니까 7,500원이 되어서 원래의 10,000원이 아닌 원래에서 25%나 빠진 가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는 시점을 그렇게 잡으면 25% 손해가 난다는 말씀.
  주식이란 게 대부분의 개미들은 마치 복권처럼 결국은 손을 털고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손을 턴 뒤에야 알게 되는 거지요. 손을 터는 도중에도 모르지요.

낚시

  낚시를 하지 않은 지 10년도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낚시방송이 갑자기 여럿 생겼습니다. 교육방송에서도 합니다. 어제는 SBS에서 생활의 달인에 플라잉낚시 캐스팅 고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끕'이 달라서 잡은 고기를 모두 놓아준답니다.
  먹을 용도로 잡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생명을 살려주는 아름다운 행위로 묘사하는 것은 그냥 나쁜 게 아니라 비열한 짓입니다. 먹기 위한 것은 이해합니다. 살아있으려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다른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생명들을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게 하는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잔인함이란.

광고에 대해

  방송사에 돈을 주고 광고를 하는 것은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같은 소비자에게는 반대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유명배우를 쓸수록 비용이 많이 발생하니까 제품이 비싸지든지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 광고한 제품은 피하는 것이 좋고, 비싼 돈을 들인 광고와 비싼 시간대에 광고하는 제품은 사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동일한 기능을 가진 다른 제품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이더에 보검이 나오니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고주들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인기있는 프로그램에 광고를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광고가 많아지는 점은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새는 일박이일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지금은 보지 않고 있지만 그거과 런닝맨, 개콘같은 프로그램의 앞뒤에는 5분 이상의 광고시간이 있습니다. 두 지상파 방송 파업으로 혜택을 제대로 입은 CBS김현정 프로그램도 그렇구요. 그런데 광고시간이 길어지면 채널을 돌리거든요. 그건 비단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닐 겁니다.
  아니 나만 그러나? 하기야 기업들이 돈을 좇아가는 건 본능인데 보지 않는 광고를 내보낼 리 없고 나만 그러나 보네요. 광고를 선택의 정보기준으로 보고 있으며 또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시청들을 하고 있는 거구나. 이런...

어이 상실

  지난 주는 3일이나 내 방에서 모여 한잔 했습니다. 목요일 교감의 말상대와 교감 일의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교무에게 교감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무의 답이 지금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인지는 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은 승진할 것 아닌가. 그러니 도와주고 있다. 이런 무슨 개똥같은...

2018년 5월 3일 목요일

미스매치

  아침을 서둘러 먹고 옆 초등학교 운동회 준비하는 걸 도와 주었습니다. 어제 걸었던 만국기 하나 떨어진 거 다시 묶고 잔디운동장에 달리기 트랙 선그어주고 차양막 두 개 설치해주고 의자 꺼내어 자리잡아 주었습니다.
  돌아와서 한참 일하다 커피를 사러 농협에 가던 길에 운동회 시작하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귀에 확 꽂히는 게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 말씀이 있겠습니다. 전체 차렷. 교장선생님께 경례." 그 다음의 말입니다.
  " 차렷. 사랑합니다."
  차렷 자세에 다시 차렷했다는 걸 지적하는 거 아닙니다. 차렷경례 한다는 것도 아니고. '차렷' 다음에 따라나온 '사랑합니다'가 귀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목에 걸린 겁니다.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들은 건 더욱 가관입니다. '선수 선서'를 하고 있는 겁니다. 뭐 정정당당하게 어쩌고... 한심한 학교 아닌가요? 화정초등학교 오늘의 운동회 시작입니다. 이름은 '한마음 체육대회'.

꿀벌의 우화

  의사였던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1714년에 쓴 것입니다. 종세 기독교 도덕은 금욕과 이타심을 미덕으로 삼았는데 이를 위선이라고 비판하며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바로 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자선(charity) 친분이나 혈연으로 매이지 않은 남에게, 또는 우리가 빚지지도 않고 어떤 것을 되받으리라 바라지도 않는 그저 낯선 사람에게조차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갖는 진지한 사랑을 순수하게 나누어 주는 미덕
  이를 흉내내는 감정으로
  연민(pity), 동정심(compassion)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재난을 동료의식(fellow feeling)으로 슬퍼해주는 마음


  그런데 자선은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에 위선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그랬겠지만 지금 본다면 아주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사람이 아주 잘나갈 때 제일 죽음을 두려워 한다. 왜냐하면 그 때 삶의 가치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2018년 5월 2일 수요일

시험

  시험의 전단계에서조건에 따라 처하는 상황이 차이가 납니다. 규모가 있는 학교에서는 자신의 교과 딱 한 학년만 출제를 하면 됩니다. 8학급 이상이 되면 한 학년의 것도 한 학년 전체 4회의 지필평가를 두 번씩만 내면 되는데 책상잽이 하는 놈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절반씩 쪼개어 내라고 하지만 안 하면 되는 걸 뭐.
  작은학교는 세 학급이 있는 경우는 교사가 9명이니까 자신의 과목만 3개 학년 꺼 내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처럼 두 학급이 되면 교사가 5명입니다. 작년 2학기 기말고사 때는 내 과목과 도덕 한 학년, 체육 한 학년까지 내니까 모두 다섯 개를 출제해야 하는 거지요.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좋은 게 있습니다. 시험감독. 모두 7명이니까 한 교실에 모두 넣어도 책상 간격이 한 발씩이고 게다가 학년을 섞으니 만고 땡, 쉽습니다. 감독 회수도 한 번뿐이고. 시내 학교 눈을 부라리고 긴장을 해도 뒤통수를 당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이거 하나는 좋습니다.

2018년 5월 1일 화요일

국회 투표기

국회의 전자투표기와 일반투표 용지입니다.

정당 변천사

국회에 게시된 대한민국 정당 변천사입니다.


거머리

오랫만에 만났는데 친구는 아니지만 징그러워도 반가웠습니다. 어렸을 때 하도 당해서 잡히는 대로 가지고 놀았습니다. 가늘고 단단한 풀대로 항문쪽을 밀어넣으면 속이 뒤집히면 도망도 못 가고 쉽게 말라 죽습니다. 논네 들어가 일을 할 때도 둠벙에서 헤엄치며 놀 때도 수시로 달라붙어 괴롭힌 놈이었거든요. 그래도 끔찍한가요?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모과꽃

모과꽃입니다.
4월17일 찍은 것입니다.

번역하기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는 '해샴'과 '독샴'이 있었습니다. '샘'이나 '샴'은 발음하기 어떤 것이 쉽냐고 따질 것 없이 비슷한데 사람들은 '샘'을 '샴'이라 불렀습니다. 또 한 글자 중 '독'은 '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땐 돌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나머지 '해'가 문제였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언젠가 그것이 '회칠한다'의 '회'란 것을 알았습니다. 옛날에는 벽의 마무리를 석회를 바르던 것이 근대 이후 시멘트가 들어와서 시멘트를 바르는 것도 '회칠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해샴'은 '회샘'인 것이고 시멘트로 단장한 샘은 돌을 쌓아 만든 '돌샘'과 구분하여 그렇게 불리게 된 것입니다.
  샘은 지하수가 나오는 것이지만 독샘은 논과 접해 있어서 먹지 않고 빨래를 했고 먹는 물은 마을 가운데에 자리한 '회샘'에서 길러다 먹었습니다. 마을 샘과의 거리는 마을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경제적 위치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샘이 깊어서 볕이 잘 들지 않아 이끼류가 많이 끼어서 해마다 두 번은 사람이 들어가서 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이 궁금한 몇 남자 아이들은 재미삼아 들어가기도 했구요. 참 짜릿한 경험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핀 꽃

    꽃이 두 가지 입니다. 잎사귀 넓은 건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닌 말똥풀이고 꽃은 꽃잎이 많은 게 민들레, 가지런하게 한 줄만 있는 게 좀씀바귀입니다. 쪼꼬만 게 화단에 많이 피어 있어 궁금해서 찾아보니 씀바귀와 같은 모양인데 아주 작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