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대단한 이야기꾼을 모르고 있었어요. 위대한 중국을 이야기한 김용이 정권의 보살핌으로 지나치게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 이 소설가와의 만남입니다. 이월하는 필명이고 본명은 릉해방(凌解放)입니다. 이름이 '해방' 그대로 입니다. 황하를 사랑하여 2월의 황하라는 뜻으로 필명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의 주류세력인 한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화를 둘러싼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하였던 그 세력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할 수 없었습니다. 동북공정이든 무엇이든 서북방 오랑캐였던 몽골에게 송나라가 넘어가서 중국 전체를 원나라가 지배했던 그 시절에 대한 평가, 마지막 왕조였던 동북방의 여진족(나중에 만주족으로 개명한)이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며 지배했던 그 시기를 어떻게 중원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중화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물쩡 덮어가고 백성은 완전히 나 몰라라 하고 유학 아니 유교놀음으로 나라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송나라와 명나라를, 송나라는 힘센 원나라와 거란과 치열하게 싸운 것으로 명나라는 야만스런 여진족과 싸운 것으로 주류들은 역사를 서술합니다. 어진 황제의 눈을 간사하고 악독한 신하들이 가려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든 것으로. 딱 그게 수호지와 김용 소설의 기본을 구성합니다. 재미있게 그의 소설들을 읽고 욕하게 된 건 그 소설들을 읽을 때 이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또 거론하지만 내게 '백양중국사'는 '해전사' 못지 않은 '개안'을 가져다 준 책입니다.
강희대제는 중국 황제 통틀어 '大'자가 들어간 유일한 황제입니다. 한족이 아니기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의 성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청나라의 황제의 성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짐작한 건데 누르하치와 그 자손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愛新覺羅로 생각합니다. 태조, 태종, 순치제에 이어 청나라 4대 황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 모든 정치행위들이 황제 그 자신에 의해 기록으로 방대하게 남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후금이던 시절 명나라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한 지역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 것이 명나라(한족) 사람들에게 잔인한 부족으로 각인이 되어서 청나라는 강희 시대에 두 가지 홍보정책(프로파간다)을 대대적으로 펼칩니다. 하나는 여진 땅을 만주라는 이름으로 바꿉니다. 한족의 증오심을 무마하는 방법으로. 그래서 만주라는 지명이 갑자기 대두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 명나라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을 무너뜨리고 죽인 것이 자신들이라고 널리 정책홍보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한 것은 한족이 1억, 만주족이 1백만 정도이고 한족들이 만주족을 오랑캐로 보고 원수로 생각을 하면서 정책에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족들은 신기한 놈들이고 유교도 징그러운데, 조선 인조의 위기 때 결사항전을 외쳤던 주전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정의라고 배워왔으니 역사학자들이나 그걸 가르친 역사 선생들은 무지할 뿐 아니라 나는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몰라서 한 일이라고 빠져 나가기에는 역할이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유학, 유교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이 앞에도 조금씩 했으니 한 가지 예로 가름합니다. 유교쟁이들은 도살장에서 죽어가며 소리지르고 몸부림치며 도축되는 짐승들이 안타깝고 불쌍하여 멀리 피하여 돌아가고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을 천하게 여겼는데, 막상 상에 올라온 고기가 반듯하게 썰어져 있지 않으면 먹지 않고 버렸다는 겁니다. 물고기 잡아 살려 주거나, 기르거나 도축할 때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죽을 때 고통없이 죽어가게 하자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완전 채식을 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식물도 생명이라는 건 모르시나 봅니다.
황제는 비밀경찰을 직속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에도 그런 조직을 언급하지 않지만 황제가 많은 정보를 사적인 대화까지도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서술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근거로 칼을 휘두르는 것은 많이 절제합니다. 자신들이 무력으로 제압하고 있지만 소수파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부릴 때 쓰면 여지없이 뱉는 것도 자주 보입니다. 같은 사람의 젖을 먹고 자랐고 충성심을 눈꼽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시위(호신)인 위동정이 황제의 남순때 안전을 고려하여 위동정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 때 호부에서 꾸어다 쓴 돈이 엄청났는데 호부의 채권 정리를 할 때 위동정의 채무가 자신 때문인 줄 알면서도 끝내 대신 갚아주지 않아 가난 속에서 죽게 되었고 그 채무는 그의 아들에게 이어지고 기껏 내린 조치는 조금씩, 천천히, 다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청렴을 이야기하려 한 것일 수 있지만 쓰고 나면 버린 행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대표적인 사례는 진황입니다. 중국은 황하를 다스리는 것이 청나라 때도 골치였습니다. 비가 내릴 때 많이 오는 것도 그랬지만 구불구불한 강이 항상 넘쳤기 때문입니다. 요순 임금 다음의 우임금도 황하의 물을 다스린 공로로 순임금의 뒤를 이어 하나라의 최초의 왕이 되었는데 문제의 해결은 청나라까지 이어졌고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낸 귀재가 진황입니다. 물난리와 끊어지는 운하의 문제까지 다 해결한 인물인데 그가 몽골의 한 부족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데 서로의 사정으로 떨어져 있을 때 미행을 나선 황제의 눈에 공주가 들어와 후궁으로 들여집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 물을 다스린 공로로 궁에 불려 온 진황은 황제의 뒤에 있는 그 여자를 보게 되었고 눈치 빠른 황제가 그것을 알게 되어 진황은 감옥에 갇히고 오랜 시간 뒤에 감옥에서 죽습니다. 죽고 나서 한 신하의 간언으로 석방하라고 하지만 이미 죽은 뒤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예들이 있지만 황제, 그것도 그 너른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나 같은 인간과 같을 수 없고 일을 처리하는 판단도 사람을 대하는 기준도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강희61년이 나옵니다. 8세에 황제가 되었으니 오래 살기도 했습니다. 기름진 음식 많이 먹은 건 아닌가 봅니다. 황자들을 많이 두었고 그들이 자신이 50 안팎일 때부터 차기 권력에 대한 암투를 벌입니다. 그의 선택은 소설의 입장에서 보면 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황자가 되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은 의미 없으니까요. 태어나면서 태자였던 2황자는 한 번 폐위 뒤에 복권을 시켜 주지만 결국 폐위됩니다. 폐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의 실정을 많이 늘어 놓지만 자신의 후궁과 놀아난 것을 결국 용서하지 못한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새로 알게 해 준 책입니다. 한자 공부도 많이 했구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여순사건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며 역사서 소개해 달라던 사람에게 '해전사'를 초기에 나온 것으로 3권까지 읽고 시간이 부족하면 2권은 반드시 읽으라고 한 다음 권한 책이 백양중국사였는데 이 책을 읽기 며칠 전이어서 지금 이야기 한다면 이것도 권하겠습니다. 역사는 단편만 알아서는 안 되고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