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8일 월요일

불교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티벳불교의 근원은 자비와 인연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야 뭐 불교의 기본정신을 견지합니다. 하지만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대중에게 생산적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이 걸식하는 것이 대중을 자비로 보고 있는 걸까요. 불경을 외우기 싫어 불경 새긴 경판을 돌리면 외운 것과 효과가 같다고 믿는 그들이 진정한 불교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동양철학에 대한 서양인의 접근

그리스 신학과 철학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의 세례를 태어날 때부터 받고 생각이 굳어진 서양인이 동양철학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 항상 의심을 했습니다. 먼저 부딪친 게 노자의 야스퍼스 번역판이었습니다. 저명한 철학자이면서 노자의 연구도 깊다고 해서 사보았던 겁니다. 알아보기가 많이 어려웠는데 용어가 맞지 않은 점 때문이었습니다. 노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道'를 길로 번역한 것부터가 걸림이었습니다. 최근 KBS다큐 '다르마'를 보면서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보는 관점이 또 그런 관점이었고 그걸 제작한 사람도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불교를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통합적인 동양청학을 분석적으로 보는 관점은 당연한 것이고 아주 기본적인 용어의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존'을 'Lord"로 번역 하더라구요. lord의 옥스퍼드 사전의 뜻은 a man who has a lot of power in a particular area of activity로 나와 있습니다. 차라리 '스승'이나 '선배'가 나았을 건데. 서양철학을 기반으로 동양철학이 어떤가 한번 들여다보자는 그런 태도로는 한국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 수준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도의 효과

리처드 도킨스에 소개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보통 어떤 주장, 특히 종교에 관련된 것들은 감정이 은근히 실려 있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변형을 시키는 경우가 있어서 신중한 접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러셀 스태너드가 '기도의 효과'를 학문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한 실험이며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영국의 저명한 종교과학자로 물리학자였습니다. 템플턴 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았는데 그 재단은 기독교 관련 재단이었고 액수는 240만 달러였습니다. 심장동맥우회술 수술을 받은 병원 6곳 1802명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대조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를 받는 그룹과 받지 않는 그룹으로 나누었고 기도를 받는 그룹은 다시 기도를 받고 있다는 걸 아는 집단과 알려주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했습니다. 모두 3그룹, 기도를 받으며 그걸 알고 있는 집단과 모르는 집단, 그리고 기도를 받지 않는 집단. 기도자들도 미네소타주, 메사추세츠주, 미주리주 등 으로 정했고 기도받는 사람의 첫이름과 성의 이니셜만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와 템플턴 재단은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확신을 하고 실험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논문으로서의 필요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었습니다. 결과? 기도로 인한 긍정적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딴 하나 의미있는 결과가 있었는데 자신이 기도를 받고 있다는 걸 아는 집단에서 합병증이 의미있게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기도할 것입니다. 애초에 그 종교가 유난히 샤머니즘쪽으로 꾸준히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성당)교회)를 부수라고 했다는데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당에서 한 것만이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잖아요. 물론 이 땅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2020년 9월 24일 목요일

안쪽의 별들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면 하늘에 떠있는 건 모두 별이라고 했겠지요. 산책을 하고 들어오다 보니 어느덧 깜깜해지고 별들이 떴습니다. 그 중 밝은 게 셋 떴는데 나란하게 보입니다. 맨 왼쪽 제일 작은 게 수성, 그 다음 금성, 그리고 반달입니다.

화정면

산책길은 두 방향이 있습니다. 숙소 나서면서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은 여러가지 좋은 점이 많은데 산길이 있어서 어두워지면 가기 무섭고 왼쪽길은 시간이 아쉽습니다. 길게 잡아도 한 시간에 불과하고 일부 구간은 찻길을 걸어야 해서 그도 무섭습니다. 짐승이나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쓰는 외국인보다는 불을 켜고 달려드는 차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늦게 출발을 할 때면 왼쪽을 갑니다. 항상 보는 바다라서 바다쪽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어젠 문득 돌아다 보니 하늘이 예뻐서 시선을 고정하니 섬들이 보입니다.
오른쪽의 불빛들은 백야도로 생각되고 저 멀리 기둥 두 개가 조발과 적금을 연결하는 교각으로 보여 한가운데 섬이 날도인 것 같습니다. 화정면이 다 보이는 셈입니다.

2020년 9월 17일 목요일

정의의 구현?

나에 관한 일인 경우 갈등이 생겼을 때 공정해지기 힘듭니다. 당연히 내 중심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더욱 공정하기 힘듭니다. 보통 '네가 이 일과 관련없는 제3자니까 네가 편정을 해줘'라로 많이 들 하지만 '제3자'의 맹점은 이 갈등에서 실제 원인이 된 '감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의 판정이 잘 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최소한 한 쪽이라도 반발하면 판정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고 말 뿐이고 둘 다 판정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사전 약속이 있어서 한 경우라고 해도 내심으로는 용납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판정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타협점을 찾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행선을 달리는 갈등에 끼어드는 것은 잘난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공정하다고 믿는 제3자의 대표적인 존재가 법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 이야기의 성격이 분명해 집니다. '법'이라는 것이 내게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됩니다. 왜 '내게'라는 전제가 붙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과 나는 정반대의 편에 서 있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법의 효용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법이 없으면 어떻게 사냐고. 나쁘든지 멍청하든지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현관앞에 있다가 뭔가 일상적이지 않은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벌새처럼 생긴 벌레가 가을에도 핀 낮달맞이꽃에 다가가려 애쓰는데 살펴보니 꽃의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거미줄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다 참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꿀을 빨기 위해 다가갔다가 꽃의 부근에서 거미줄에 걸린 벌레를 구해줘야 할까요? 그걸 구해주고 仁이라고 공자는 말할 것이고 막내는 자비라고 말할 것이지만 난 참견이라고 보았습니다. 자리에 와서 찾아보니 그 벌레는 박각시나방이랍니다.

2020년 9월 16일 수요일

중2병인가?

00이는 아이들 속에서 보면 배려심도 있고 괜찮은 아이입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게 흠이지요. 지들 해야 하는 일이라 봐야 가지고 놀았던 공 제 자리에 둔다든지 청소한다든지 사소한 것들이지만 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또 못마땅한 것 찾으려면 배구만 하려는 것입니다. 운동되지 않으니 축구를 하자고 해도 축구하는 때면 온갖 패악을 저지릅니다. 내가 받아주니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요. 배구할 때도 다칠까봐 블로킹을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하는 것도 미운 짓이네요. 그러더니 최근 들어서는 수업시간에 공부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일부러 내게 반항을 하려는 것도 같고, 실은 반항보다는 앙탈이라고 해야 하나? 투정이라고 해야 하나. 중2병일까요?

보울 만들기? 아니 꾸미기

학생들 체험학습을 하면서 여유가 있다고 함께 해도 된다고 해서 참가했습니다. 세라믹 보울에 그림을 그려 주면 구워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도화지와 크레용조차도 갖춰본 적이 없어서 그림 그리는 것을 두려워 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려야 했고 아주 꽝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남다른 관찰력 덕분에 조금씩 비슷하게 그릴 수 있고 색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딘지 미숙해 보여도 내가 만든 것입니다.

몽어

숭어의 새끼를 몽어, 전라도 사투리로는 몬치, 모치라고 합니다. 물이 들면 해변으로 몰려드는데 숭어도 자주 몰려드는 듭니다. 훑치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죽창을 쓰기도 하고 들어가서 손으로 물밖으로 제쳐내기도 합니다. 어제는 화태 산책을 가다 예교에서 떼를 만났습니다. 김선생님이 그 동네 할머니께 빌린 뜰채로 짧은 시간에 다섯 마리를 잡았는데 더 잡을 필요 없어서 그것만 잡았습니다. 날 좋을 때 3일 정도, 그러니까 바싹 말리지 않고 겉의 물기만 완전히 마르고 누르면 약간은 말랑거릴 정도로 말려서(여기 사투리로 삐득삐득 말려) 구워 마요네즈 찍어 맥주안주로 하면 최고입니다. 회로 먹을 땐 익은 김치에 싸먹으면 맛있습니다.

2020년 9월 15일 화요일

반딧불이

귀신이니 도깨비니 실제로 보았다는 사람들의 당시 정신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두려우면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현상들이 특별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보앗다고 말을 밖으로 뱉어내는 건 자신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때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커밍아웃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는 2학년 수업 때 화태 쪽으로 저녁산책을 갓다고 했더니 00이가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해서 어제 산책을 가면서 연락을 해서 함께 다리를 건너 갔다 왔습니다. 날씨도 흐렸지만 요새는 하루 무섭게 낮이 짧아지고 있어서 아이 두고 올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렸고 산길은 길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찻길로 가는 것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산길로 왔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도깨비불처럼 빛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방향이나 빠르기가 일정하지 않게, 어떤 건 아주 밝게, 어떤 건 희미하게. 소름이 돋더라구요. 반딧불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2020년 9월 13일 일요일

선택.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선택'을 항상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실패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항상 선택의 순간에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잇는 중요한 능력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장애는 특히 심하다고 합니다. 토론문화가 없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론을 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어느 편을 갖게 되는데 현대사만 해도 목숨을 건 많은 환란들이 선택을 기피하고 생존을 우선으로 두게 된 것이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막아 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로 이견을 봉쇄하는 것으로 한 가지 생각만 옳다는 것으로 몰아왔기 때문에 가만히 의견들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 보다 다수의 편에 붙는 생존법이 점점 강화되어 현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가치에 대한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단순한 지식에 대한 질문마저도 대답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훈련을 통해 능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들을 고민하고 그 상황에 제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제일 흔한 '음식 선택'. 오죽하면 텔레파시 시험의 첫번째가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여성들의 화법까지 번져 갔습니다. '금성 여자'로 포장하지만 한반도의 역사에서 환난을 교묘하게 피해 나왔던 충청도 사람들의 화법과 아주 동일합니다. 애매한 표현. 그것은 자신들의 장양할 만한 언어적 특성이 아니고 자신의 언어적 표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기 위한 얄팍한 수싸움일 뿐입니다. 토론의 장으로 나오면 단 일분도 맥을 추지 못하는 얄팍한 수. 선택에 대한 장애는 국정을 논하는 이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선택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무조건적 부정적인 거부로 나타납니다. 의견이 다르면 다른 지점을 판단하고 절충이나 분쇄로 나가야 하는데 다른 의견이 나오는 순간 상대의 의견에 대해 이해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의견을 분쇄할 수도 없게 되고 반대만 하는 것입니다. 2차 재난지원금에 대해 이재명이 이야기한 지원금의 성격이 '구제'가 아니라 '경제활성화'여야 한다는 의견에 대한 분노 어린 공격도 그의 의견을 아예 이해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국민은 가난보다 공정하지 않는 것에 분노한다'는 의견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듣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한 뒤였다면 그런 단선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곳보다 정치판에서는 제일 타협적이어야 합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에는 '공생적 이익'이 '정의'를 우선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심리학자들이 실험한 최후의 통첩게임에서도 1달러만 받아도 이익인 B실험군의 사람들은 자신이 받지 못하더라도 불공정함에 저항하고 받기를 포기했다는 건 아주 유명한 사례입니다. 이재명의 표현대로 그들의 이번의 선별지급에 대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의 분노를 다음선거에서 처절하게 맛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전에 '사건'과 '사고'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단순하지 않은 용어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능력입니다. 엊그제는 '옷'에 대한 정의를 듣고 같은 감탄을 하였습니다. 너는 몸을 가리기 위해서 입고 나는 몸을 보여주기 위해 입는 것. '사건'은 해결해야 하지만 '사고'는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원상으로 되돌린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하수가 역류하면 개수구 부분을 긁어냈을 때 당장은 빠지겠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생길 것이고,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을 부린다고 연락이 오면 봉투를 보내거나 아이를 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벌어지면 그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큰 범주의 것일 때는 그럴 필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렵기도 합니다. 현재 출생률이 걱정스럽게 떨어진다고 보육환경을 개선하고 보육비를 주는 것을 종국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난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시험을 잘 보면 소득이 높은 직장에 갈 수 있도록 구조화된 학교의 시스템이 내가 보는 원인 그 하나입니다. 그에 해당되는 분야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학교(시험)성적이 좋다고 일을 더 잘한다고 믿는 기업 운영자는 얼마 없을 것이고 그렇게 믿는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은 성장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시험 성적이 좋아서 명문대 인기학과에 가고 그를 발판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에 가는 게 당연하다고 굳어진 사회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교육의 문제는 아이와 아이에 장차 기댈 자신의 꿈을 일찍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층상승을 기대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출산을 거부합니다.대입 입시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공정하지도 않은 수능성적을 공정하다고 믿고 수능성적이 높은 학생이 대학공부 잘 할 것이라고 믿는 건 무지한 믿음이지만, 이처럼 다수가 믿는 다는 것이 해결가능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대입제도의 개선이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또 하나의 해결책은 어떤 형태로 태어난 아이라도 모두 국가가 부족하지 않게 제도적으로 키워주는 것입니다. 성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부터 가난한 부모를 가진 아이까지 태어난 모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도 출생률을 거의 15%까지 늘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부동산 대책에 대한 문제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정부가 대책을 내어 놓고 있어도 대출을 받아가며 주택을 구입하고 있는 것의 이면은 주택에 대한 개념의 문제입니다. '의식주'의 '집'이 아닌 '재산'의 '물건'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재산'이며 갖지 못한 사람이 힘들게 구하고 있는 것은 '거주공간'인 것으로 이 둘은 같은 사물으로 놓고 완전히 다른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며 '칼'을 두고 '조리도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협하여 '돈을 갈취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역대 정권들이 부동산 정책을 경제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해 오면서 수요가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거지요. 금리 등 경제의 문제를 부동산에서 떼어내고 '집'을 '거주지'로 명시하고 보유세를 매기면 됩니다. 최근의 감염병 문제입니다. 전염병은 단순합니다. 모여 사는 것과 이동의 문제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된 것은 상업적인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장소를 띄엄띄엄 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동하는 것은 스스로 억제할 수 있습니다. '지 발 달려 지가 돌아다는 걸 어떻하겠냐'는 건 어렸을 때 나가서 다쳐 온다든지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온다든지 하면 개에 견주어 가며 듣던 말이었습니다. 돌아다니지 않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병이 번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주무부서는 이동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부와 매스컴은 괘념치 않고 여행을 장려합니다. 모여 살아도 이동하지 않는다면 지역내에서 다 죽고 다른 지역으로의 전이는 없는데 지들 표현으로 '힐링'을 다른 지역에서 찾으면서 생기는 일이라는 건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에는 눈감고 다른 희생양을 교회모임에서 찾습니다. 교회를 갔더라도 감염자가 다른 곳에 가지 않앗으면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면을 보지 않고 그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가계의 대출이 그것도 신용대출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심각한 국가경제 붕괴의 뇌관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저금리도 아닌 제로금리 때문 아닙니까. 2% 이자로 돈을 꾸어다 4%만 이익을 내도 이익이니까 다들 빚을 내어 집을 사고 주식을 사는 건데 금리 올리면 되잖아요. 그러면 기업이 운영에 타격을 입는다고요? 아, 국민 위한다고 말만 하고 국민은 폭탄을 떠안고 있는데 기업만 살리려고 하잖아요? 기업이 살아야 국가경제가 살고 그래야 국민도 산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기업이 잘 풀린다고 국민이 그 혜택을 본다는 그 거짓말은 언젯적 것인가요?

2020년 9월 3일 목요일

붕당(사색당파)

조선 전기 국가 성립과 이후 세조의 쿠데타 공신들인 훈구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자 그 동안 훈구와 대립시키기 위해 길러왔던 사림들이 힘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싸웁니다. 물론 유교적이라거나 전통이라거나 그런 가치를 앞에 세우는 사람들과 똑같이 항상 명분을 앞에 세우지만 속내는 재산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앞의 훈구와 사림의 싸움이 사화로 나타났고 이후 사림들의 싸움을 동, 서, 남, 북 사색당파라고도 하고 붕당이라고도 합니다. 붕당은 붕이 朋이기 때문에 좋은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고 앞의 표현은 깎아 내리기 위한 표현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정리했습니다.

2020년 9월 2일 수요일

옛날

어렸을 대 살았던 곳을 가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 큰 줄 알았었는데 정말 작았었네? 10대의 초반까지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목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도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그를 김집사라고 불렀고 교회가 없고 마을 공회당을 썼습니다. 그 마을은 주변의 중심마을이었고 내가 산 마을은 변두리 작은 마을이어서 밤예배를 보고 돌아오는 때는 많이 무서웠습니다. 두 마을 사이에 언덕배기를 가로질러 깎아 만든 길이 있어서 협곡을 자나는 느낌인데 그 언덕 위에는 핏빛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른들 말을 종합해서 내가 배운 역사지식을 결합해 보면 전쟁 전에 보련 관련 사람들을 한 번, 그리고 전쟁 때 저쪽과 관련이 있다고 부역자로 몰린 사람들 또 한 번 집단 처형을 한 곳이 그 언덕 위였습니다. 죽을 사람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고 줄을 세운 뒤 죽창으로 찔러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게 한 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매장했다고 어른들이 그랬고 흐린 날이면 퍼런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그 길을 밤에 지나올 때면 길이 좁아서 한 줄로 지나는데 앞은 앞대로 뒤는 뒤대로 가운데는 가운데대로 무서워서 찬송가를 크게 부르며 정신없이 뛰어 지나갔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뒤 아버지 돌아가시고 찾은 그 곳은 어른이 된 내 키 정도의 높이일 뿐이었습니다. 낭도에서의 삶은 단조로웠지만 살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뒤집을만큼 힘들게 했던 것이 물부족이었습니다. 지하수에 염분이 나오기 때문에 산에 저수지에 물을 담아서 전체가 그걸 식수로 썼습니다. 강수량이 적은 겨울이 문제였습니다. 들어간 이태째는 유난히 겨울가뭄이 심해서 재한급수가 극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몇 주째 계속되면서 많이 힘들었고 갈등이 만들어졌습니다. 관공서, 그러니까 동사무소 출장소, 파출소 출장소, 보건지소와 농협을 물공급을 해주는데 선생인 난 혜택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5명이 한 가족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그 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네 청년들과 다툼이 벌어졌고 관공서도 아닌 농협도 주면서 선생은 안 주는 게 맞냐는 말에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이 돌아왔고 난 학교를 무시하면 학교가 없어지게 되고 학교가 없어지면 아이를 가진 젊은 사람들이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 섬은 죽는다고 말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습니다. 난 정나미가 떨어져 바로 3월 발령으로 나와 버렸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얼마 되지 않아 폐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고흥과 화양을 잇는 다리가 열렸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다 늙은이들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외지인들이었습니다. 살았던 집을 찾아 보았습니다. 내가 들어갈 때 여러 해 동안 쓰지 않았던 집이라 폐가 수준이었는데 내 돈으로 고쳐고 청소해서 두 채를 썼습니다. 한 채는 어머니 방과 보일러실, 다른 채는 아내와 아이들 넷.
정면이 어머니 방, 오른쪽 풀밭이 네 식구 살던 곳이었는데 그 곳은 깨끗이 치워지고 풀밭이 되었네요. 어떻게 저 좁은 곳에 집이 있었고 그 식구들이 살았었을까요.

지금 핀 꽃

    꽃이 두 가지 입니다. 잎사귀 넓은 건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닌 말똥풀이고 꽃은 꽃잎이 많은 게 민들레, 가지런하게 한 줄만 있는 게 좀씀바귀입니다. 쪼꼬만 게 화단에 많이 피어 있어 궁금해서 찾아보니 씀바귀와 같은 모양인데 아주 작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