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뒷 배경으로 보이는 것들이 거슬리네요. 빨래감들은 땀이 찬 거라 말리려고 그런 것이고 그 뒤의 빨레 건조대에 있는 속옷도 입던 거 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8월 30일 목요일
2018년 8월 27일 월요일
이면
이면裏面은 보통 사람들이 '속'을 뜻하는 裏인 줄 모르고 異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면'이란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현상에 가려진 '진짜 속 내용'을 말합니다. 내가 아침마다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하는 '김성완의 행간'의 그 '행간'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하도 미투운동이 강하게 진행중이라 말하기 두렵긴 하지만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겠습니다. 노후 여성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늙은 남성들의 젊었을 적의 '바람'에 대해 방송에서 많이 언급합니다. 예능프로그램 뿐 아니라 시골을 더듬고 다니는 다큐 혹은 농촌탐사 프로그램에서도요. 어쩌다 듣는 게 아니라 '옛날에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이면의 이야기 입니다. 그 '바람'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 남자 홀기는 여자가 방방곡곡 돌아다닌 것 아닐 진데 어떤 여자가 그 대상이었을까요. 그들은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여자들은 戰後 남편 잃고 홀로 생활유지가 힘들었던 아이들 딸린 사람들 아니었을까요.
하도 미투운동이 강하게 진행중이라 말하기 두렵긴 하지만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겠습니다. 노후 여성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늙은 남성들의 젊었을 적의 '바람'에 대해 방송에서 많이 언급합니다. 예능프로그램 뿐 아니라 시골을 더듬고 다니는 다큐 혹은 농촌탐사 프로그램에서도요. 어쩌다 듣는 게 아니라 '옛날에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이면의 이야기 입니다. 그 '바람'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 남자 홀기는 여자가 방방곡곡 돌아다닌 것 아닐 진데 어떤 여자가 그 대상이었을까요. 그들은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여자들은 戰後 남편 잃고 홀로 생활유지가 힘들었던 아이들 딸린 사람들 아니었을까요.
바다에서의 속력
육지에서의 속력은 MKS단위로 km/h, cms단위로 m/s를 씁니다. 물론 못된 두 나라의 것들은 거리 단위를 마일을 쓰고 있구요. 바다는 다릅니다.
육지에서 길을 잃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바다는 길을 잃으면 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방위'이고 그것을 잡아주는 기준이 북극성이었습니다. 내 생각인데 그 많은 1등성 중에서 북극성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북두칠성이어서 북위도의 지역에서 북두칠선에 대한 행운의 상징성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향도 중요하지만 거리도 중요합니다.
바다에서의 거리의 단위는 '해리'입니다. 1해리는 1852m인데 그 거리는 위도의 1초의 평균거리이며 해리를 쓰기 시작한 건 17세기부터이고 이 거리를 쓰기로 한 건 1929년 부터라고 합니다. 바다에서릐 속력은 그래서 해리/시간이고 이것이 '노트'입니다. 내가 타는 여객선은 대략 10노트이니까 한 시간에 10해리를 가는 것이고 육지 단위로 바꾸면 대략시속 18km정도가 되는 거죠.
각도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썼던 60진법을 따릅니다. 따라서
1˚=60′(분), 1′=60″(초)입니다.
시간은 1h=60min, 1min=60sec, 1sec=10ds(deci), 1ds=10cs(centi) 입니다.
육지에서 길을 잃는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바다는 길을 잃으면 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방위'이고 그것을 잡아주는 기준이 북극성이었습니다. 내 생각인데 그 많은 1등성 중에서 북극성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북두칠성이어서 북위도의 지역에서 북두칠선에 대한 행운의 상징성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방향도 중요하지만 거리도 중요합니다.
바다에서의 거리의 단위는 '해리'입니다. 1해리는 1852m인데 그 거리는 위도의 1초의 평균거리이며 해리를 쓰기 시작한 건 17세기부터이고 이 거리를 쓰기로 한 건 1929년 부터라고 합니다. 바다에서릐 속력은 그래서 해리/시간이고 이것이 '노트'입니다. 내가 타는 여객선은 대략 10노트이니까 한 시간에 10해리를 가는 것이고 육지 단위로 바꾸면 대략시속 18km정도가 되는 거죠.
각도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썼던 60진법을 따릅니다. 따라서
1˚=60′(분), 1′=60″(초)입니다.
시간은 1h=60min, 1min=60sec, 1sec=10ds(deci), 1ds=10cs(centi) 입니다.
대화의 온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을 할 때는 말투, 단어 음색 등이 대화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 중에서 과잉표현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국립국어원에도 올라온 "주문하신 음식 나오셨습니다"라거나 "로그인을 하셔야 지원이 가능하십니다" 등은 올림의 대상이 분명 잘못된 것이어서 난 불쾌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또 하나의 불편한 표현으로 진행자들이 쓰는 "~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의 표현입니다. "~을 시작하겠습니다"가 그리 딱딱한 표현이 아님에도 천하의 유능한 진행자인 유재석도 그런 표현을 자주 씁니다.
실은 그걸 말하려 한 것은 아니고 '예예예'나 "네네네'에 대한 느낌입니다. 쓰는 사람들은 굽실거리는 느낌으로 쓰는지 몰라도 많이 불쾌합니다. 듣기 싫어서 그만 말하라는 것으로 들리거든요. '네'가 하나 더 붙으면 그런 느낌이 더 심해집니다. 그 말꼬리가 올라가면 전투적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하고 올리지 않더라도 더 듣기 싫다는 그낌을 받습니다. 단순한 내 느낌일까요?
말을 할 때는 말투, 단어 음색 등이 대화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 중에서 과잉표현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국립국어원에도 올라온 "주문하신 음식 나오셨습니다"라거나 "로그인을 하셔야 지원이 가능하십니다" 등은 올림의 대상이 분명 잘못된 것이어서 난 불쾌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또 하나의 불편한 표현으로 진행자들이 쓰는 "~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의 표현입니다. "~을 시작하겠습니다"가 그리 딱딱한 표현이 아님에도 천하의 유능한 진행자인 유재석도 그런 표현을 자주 씁니다.
실은 그걸 말하려 한 것은 아니고 '예예예'나 "네네네'에 대한 느낌입니다. 쓰는 사람들은 굽실거리는 느낌으로 쓰는지 몰라도 많이 불쾌합니다. 듣기 싫어서 그만 말하라는 것으로 들리거든요. '네'가 하나 더 붙으면 그런 느낌이 더 심해집니다. 그 말꼬리가 올라가면 전투적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하고 올리지 않더라도 더 듣기 싫다는 그낌을 받습니다. 단순한 내 느낌일까요?
2018년 8월 20일 월요일
우연의 확대해석
많이 알려진 미스터리들이 있습니다. 옥수수밭, 사막, 들판 등에 그려진 그림이나 기호들. 외계인이 그려놓고 갔다는 사람들이 많고 고대인이 그랬다면 뭘 뜻하는 건지 궁금하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방금 운동장을 내려다보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올 여름 가뭄과 열기로 잔디도 말라가는 상황이어서 운동장에 물을 주었답니다. 그래도 시들시들한데 그 중 아주 생생하고 파랗게 살아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뭔가를 의미하는 듯한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형같기도 하고 기호 같기도 한 것들이요. 전에 비 온 뒤 한 두 개 생긴 적 있지만 이번은 여러 개의 뚜렸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곰팡이류의 영향인 걸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신비주의자나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이걸로 또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야기나 괴담을 만들어 내겠지요?
방금 운동장을 내려다보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올 여름 가뭄과 열기로 잔디도 말라가는 상황이어서 운동장에 물을 주었답니다. 그래도 시들시들한데 그 중 아주 생생하고 파랗게 살아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뭔가를 의미하는 듯한 특별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형같기도 하고 기호 같기도 한 것들이요. 전에 비 온 뒤 한 두 개 생긴 적 있지만 이번은 여러 개의 뚜렸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곰팡이류의 영향인 걸로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신비주의자나 기적을 믿는 사람들은 이걸로 또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야기나 괴담을 만들어 내겠지요?
2018년 8월 13일 월요일
부럽
지금 보는 한겨레21은 뉴스(news)성을 빼고 보면 볼만 합니다. 시사인이 자꾸 보라고 귀찮게 하지만 동료교사가 보는 걸 이어받아 몇 주 보고는 수준차이를 느꼈습니다. 문장력, 깊이, 방향성 등. 문제는 올해 년초까지 보았던 한겨레21이 목요일, 그것도 오후에 배달된다는 것입니다. 금요일에 받아보는 시사주간지는 시사성이 없으니 그 돈을 주고 볼 일이 없어서 두 차례에 걸쳐 문제 해결을 요구했지만 우체국의 문제라 자신들은 방법이 없답니다. 웃기는 곳이지요. 언제부터인가 인쇄 신문이나 잡지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는데 가장 핵심인 배달체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못하는 게 아님) 방법이 없다니. 당연히 구독중단. 아쉽던 차에 다른 이의 것을 이어 받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컬러 바탕의 한 쪽 짜리라고 해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뒤로 가면 보물들이 숨어 있거든요. 최근 호에 새로 보는 꼭지의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습니다. '일기 쓰는 남자'인데 그가 지금처럼 더웠던 1994년에 쓴 일기였습니다. 초등생 일기장인데 글씨체가 놀라워 나이를 한참 찾아 보았습니다. 아홉 살. 이런 데는 만나이를 쓰지 않는데 만나이라고 쳐도 초등학교 3학년.
언론에 자신이 공개한 건데 가져다 올려도 되겠지요? 안전하게 주소 올릴까요?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61.html
역시 존경하는 한겨레의 기자가 될 그릇입니다. 대단한 글솜씨입니다. 그런데 빨간 펜이 신경이 쓰입니다. 큰 놈 고등학교 시절 에세이를 그의 모자란 국어선생이 평가한 것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두 가지 지적 사항 모두 시제에 대한 건데 그런 정도의 차이는 중학생도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 본 아이가 아니면 구분을 못할,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미숙한' 표현(!)이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부러운 것이 이 지점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완성도와 표현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이 글에 저런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
첫 번째 지적은 타당합니다. 아직 놓아준 것이 아니니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면 안되니 굳이 그 표현을 쓰려면 '그리울 것 같았다'라고 해야 하니 지적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끼어듦이 과합니다. 교사의 그낌대로 '아쉽기 때문'에 '보내주고 싶지 않지만 보내줄 수밖에 없는 심정'이 아이의 표현대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글을 간결하게 쓰라고 그랬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글쟁이의 길고 현란한 수사가 아닌 애틋한 아쉬움의 표현마저 금지한다면 그건 에세이도 아닌 보고서도 아닌 '논문급'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거슬리는 것은 일기에 별점을 매긴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평가일까요. 일기가 평가의 대상인가요? 사실성을 성실하게 나타냈다고 본 것이라면 교사는 아이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신의 눈'을 가진 것이고 글을 잘 썼다고 평가한 것이라면 '평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수학 서술형 문제에서 '시제'나 '맞춤법'을 틀린 것은 감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더워서 딴지 거는 게 아니고 정말 두 가지 감정 모두 깊게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생과 교사, 그리고 지나친 참견.
컬러 바탕의 한 쪽 짜리라고 해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뒤로 가면 보물들이 숨어 있거든요. 최근 호에 새로 보는 꼭지의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습니다. '일기 쓰는 남자'인데 그가 지금처럼 더웠던 1994년에 쓴 일기였습니다. 초등생 일기장인데 글씨체가 놀라워 나이를 한참 찾아 보았습니다. 아홉 살. 이런 데는 만나이를 쓰지 않는데 만나이라고 쳐도 초등학교 3학년.
언론에 자신이 공개한 건데 가져다 올려도 되겠지요? 안전하게 주소 올릴까요?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61.html
역시 존경하는 한겨레의 기자가 될 그릇입니다. 대단한 글솜씨입니다. 그런데 빨간 펜이 신경이 쓰입니다. 큰 놈 고등학교 시절 에세이를 그의 모자란 국어선생이 평가한 것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두 가지 지적 사항 모두 시제에 대한 건데 그런 정도의 차이는 중학생도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 본 아이가 아니면 구분을 못할,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미숙한' 표현(!)이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부러운 것이 이 지점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완성도와 표현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이 글에 저런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것.
첫 번째 지적은 타당합니다. 아직 놓아준 것이 아니니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면 안되니 굳이 그 표현을 쓰려면 '그리울 것 같았다'라고 해야 하니 지적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끼어듦이 과합니다. 교사의 그낌대로 '아쉽기 때문'에 '보내주고 싶지 않지만 보내줄 수밖에 없는 심정'이 아이의 표현대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글을 간결하게 쓰라고 그랬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글쟁이의 길고 현란한 수사가 아닌 애틋한 아쉬움의 표현마저 금지한다면 그건 에세이도 아닌 보고서도 아닌 '논문급'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거슬리는 것은 일기에 별점을 매긴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평가일까요. 일기가 평가의 대상인가요? 사실성을 성실하게 나타냈다고 본 것이라면 교사는 아이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신의 눈'을 가진 것이고 글을 잘 썼다고 평가한 것이라면 '평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수학 서술형 문제에서 '시제'나 '맞춤법'을 틀린 것은 감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더워서 딴지 거는 게 아니고 정말 두 가지 감정 모두 깊게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생과 교사, 그리고 지나친 참견.
2018년 8월 12일 일요일
자존감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 '자존감 키우기' 바람이 분다네요. 비싼 돈 주고 배운답니다. 자존감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1.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습니다.
2.스스로 품위 를 지키고 자기 를 존중하는 마음. 다음한국어사전
3.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게 심리학에서도 쓰는 정의인 것 같습니다. 이것과 이웃한 다름 개념들이 있습니다. 자신감과 자만감. 자신감은 자존감과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자존감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고 자신감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공통점은 주관적이란 거구요. 자만심은 둘 모두와 관련이 있지요.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넘쳤을 때의 그 사람의 마음상태라고 쉽게 이야기 해도 될 듯 합니다.
그런데 직장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자존감이 떨어졌고 그 비싼 치료비(정신과 의사한테 수업료를 내니까)를 지불하고 자존심을 채웠는데 그리고 다시 보는 그 직장상사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의 두터워지고 높아진 자존감이 상사와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가 바로 잡으려 하면 바로 잡힐까요? 계속 저항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상사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긴장을 하면서도 질서가 잡혔을 거지만 항상 굴복을 한 사람이라면 대드는 순간 전과 비교되지 않은 공격이 닥칠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심리니까요.
자존감에 대한 해결책요? 전에 이야기한 대로 자신을 아낀다면 칭찬은 버리고 지적은 받아들여 단점들을 없애가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가치로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항상 판단과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가치에 잘못 된 것을 묵인하거나 방조한 자신이 자랑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비열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비열한 사람이 자존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감과 자만감은 넘치로록 있을 수 있지만.
1.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습니다.
2.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게 심리학에서도 쓰는 정의인 것 같습니다. 이것과 이웃한 다름 개념들이 있습니다. 자신감과 자만감. 자신감은 자존감과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자존감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고 자신감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공통점은 주관적이란 거구요. 자만심은 둘 모두와 관련이 있지요.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넘쳤을 때의 그 사람의 마음상태라고 쉽게 이야기 해도 될 듯 합니다.
그런데 직장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자존감이 떨어졌고 그 비싼 치료비(정신과 의사한테 수업료를 내니까)를 지불하고 자존심을 채웠는데 그리고 다시 보는 그 직장상사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의 두터워지고 높아진 자존감이 상사와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가 바로 잡으려 하면 바로 잡힐까요? 계속 저항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상사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긴장을 하면서도 질서가 잡혔을 거지만 항상 굴복을 한 사람이라면 대드는 순간 전과 비교되지 않은 공격이 닥칠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심리니까요.
자존감에 대한 해결책요? 전에 이야기한 대로 자신을 아낀다면 칭찬은 버리고 지적은 받아들여 단점들을 없애가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가치로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항상 판단과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가치에 잘못 된 것을 묵인하거나 방조한 자신이 자랑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비열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비열한 사람이 자존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감과 자만감은 넘치로록 있을 수 있지만.
2018년 8월 11일 토요일
나침반? 조언? 간섭? 잔소리?
질문부터 합니다. 당신은 넷 중 어느 것? 아무 것도 아닌가요? 무관심이나 방관인거죠?
토요일 아침은 텔레비전 볼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SBS는 광주방송 지역방송을 하는데 시사토론 방송이고 수준이 딱 출연자들 외모 수준입니다. KBS2에서는 부자가정 아이 육아프로그램을 하고 KBS1에서는 노인네(!)들 나와서 오지랖 떠는 황금연못을 하고, EBS는 유아들을 위한 거, MBC는 지역방송을 하는데 지역을 위한 게 아니고 지역사람들을 전국방방곡곡으로 여행 떠나보내는 '전국시대'를 합니다.
에피소드 재미있는 게 이따금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금연못을 보는데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인생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후대의 나이 덜 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주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엄한 목소리로 꾸짖기도 합니다. 그게 심하면 광주방송으로 돌려 보다가 제대로 된 취재도 하지 않고 자신의 논조라는 것을 말하면 다시 한국방송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 넘게 볼 것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다 엊그제 그 연못 프로그램에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면 거기 나와서 다른 나이 든 사람들(평소 어르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노인)이 판정을 해주는 꼭지에 부자가 나왔습니다. 이번 사연은 예순다섯의 아버지가 자전거 사고를 당한 뒤 아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해 보았고 아들과 소원했다고 생각한 모양인 거지요. 아들과 소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소통이란 것은 서른다섯인가 하는 아들을 보기만 하면 가르치러 드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처음엔 아들도 대꾸해 주지만 그 다음(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아들의 의견을 묵살한)부터는 멍하니 있다가 계속 이어지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그러면 아버지는 그 이야기에서 휴대폰이 얼마나 대인관계와 건강을 해치는지로 건너 그의 소통(!)시도는 이어집니다.
방송에서도 아들의 소통이란 게 들어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도 이해를 하지 못했는지 그냥 아들의 말은 무시하는지 대꾸나 언급없이 지나갑니다.
연륜이라는 것 인정합니다. 그런데 통하는 데가 있어야 하며 옳다 하더라도 상대의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최소한 맞짱구가 있어야 하며 최대한으로는 그 대화 내용을 다음에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그 다음이고 금방의 그 조건이 대화의 조건입니다.
어이가 없고 열통 나서 전국시대로 돌리니 거창장의 할매들이 나옵니다. 그 꼭지가 끝나가는 참이었습니다. 내내 방송사가 따라다녔던 할매들이 장을 보고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피디가 인삿말을 합니다. 할매 넷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피디가 '할머니들이 어쩜 그리 예쁘게 생겼냐'고. 넷 중 둘은 옹알이었고 둘의 말은 문장이 또렸하게 완성이 되어 들렸습니다. 한 분은 "내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네"였고 또 한 사람은 "원래 바탕이 이쁘니 그렇지". 위의 에피소드의 어버지와 연결이 되지 않나요? 결이 다른가요? 난 눈에 환하게 보입니다. 그 아버지와 뒤의 할머니가 지금이라도 함께 살면 세상 행복한 한 쌍이 되겠다고.
토요일 아침은 텔레비전 볼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SBS는 광주방송 지역방송을 하는데 시사토론 방송이고 수준이 딱 출연자들 외모 수준입니다. KBS2에서는 부자가정 아이 육아프로그램을 하고 KBS1에서는 노인네(!)들 나와서 오지랖 떠는 황금연못을 하고, EBS는 유아들을 위한 거, MBC는 지역방송을 하는데 지역을 위한 게 아니고 지역사람들을 전국방방곡곡으로 여행 떠나보내는 '전국시대'를 합니다.
에피소드 재미있는 게 이따금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금연못을 보는데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인생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후대의 나이 덜 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주 자신의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엄한 목소리로 꾸짖기도 합니다. 그게 심하면 광주방송으로 돌려 보다가 제대로 된 취재도 하지 않고 자신의 논조라는 것을 말하면 다시 한국방송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 넘게 볼 것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다 엊그제 그 연못 프로그램에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면 거기 나와서 다른 나이 든 사람들(평소 어르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노인)이 판정을 해주는 꼭지에 부자가 나왔습니다. 이번 사연은 예순다섯의 아버지가 자전거 사고를 당한 뒤 아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해 보았고 아들과 소원했다고 생각한 모양인 거지요. 아들과 소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소통이란 것은 서른다섯인가 하는 아들을 보기만 하면 가르치러 드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처음엔 아들도 대꾸해 주지만 그 다음(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아들의 의견을 묵살한)부터는 멍하니 있다가 계속 이어지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그러면 아버지는 그 이야기에서 휴대폰이 얼마나 대인관계와 건강을 해치는지로 건너 그의 소통(!)시도는 이어집니다.
방송에서도 아들의 소통이란 게 들어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도 이해를 하지 못했는지 그냥 아들의 말은 무시하는지 대꾸나 언급없이 지나갑니다.
연륜이라는 것 인정합니다. 그런데 통하는 데가 있어야 하며 옳다 하더라도 상대의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최소한 맞짱구가 있어야 하며 최대한으로는 그 대화 내용을 다음에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그 다음이고 금방의 그 조건이 대화의 조건입니다.
어이가 없고 열통 나서 전국시대로 돌리니 거창장의 할매들이 나옵니다. 그 꼭지가 끝나가는 참이었습니다. 내내 방송사가 따라다녔던 할매들이 장을 보고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피디가 인삿말을 합니다. 할매 넷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피디가 '할머니들이 어쩜 그리 예쁘게 생겼냐'고. 넷 중 둘은 옹알이었고 둘의 말은 문장이 또렸하게 완성이 되어 들렸습니다. 한 분은 "내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네"였고 또 한 사람은 "원래 바탕이 이쁘니 그렇지". 위의 에피소드의 어버지와 연결이 되지 않나요? 결이 다른가요? 난 눈에 환하게 보입니다. 그 아버지와 뒤의 할머니가 지금이라도 함께 살면 세상 행복한 한 쌍이 되겠다고.
휴대폰 찾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거나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는 방법입니다. 크롬을 실행합니다. 익스플로러에서 해봤는데 에러가 뜨네요. 다음에 또 시도해 보겠지만 일단 성공한 크롬에서 찾겠습니다. 자신의 구글계정으로 로그인 합니다. 당연히 구글 계정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 포털사이트와 달리 여러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데, 구글 계정이 도용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두 가지 정보를 요구합니다.
하나는 현 계정에 접속하려는 시도가 폰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다른 경로인 경우 구글 계정과 추가 등록한 이메일 계정으로 이메일이 옵니다. 구글계정 접근이 되지 않을 때 추가 등록해 둔 그 이메일 계정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또 주로 쓰는 아이피가 아닌 다른 아이피로 구글에 접속하려 하면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구글에 로그인이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정보를 구글이 요구하는데 바로 여기 등록한 전화기(전화번호)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크롬에서
로그인한 뒤
프로필사진(등록하지 않았다면 둥근 원 안에 자신의 이름이 써진)을 클릭하면
하나는 현 계정에 접속하려는 시도가 폰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다른 경로인 경우 구글 계정과 추가 등록한 이메일 계정으로 이메일이 옵니다. 구글계정 접근이 되지 않을 때 추가 등록해 둔 그 이메일 계정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또 주로 쓰는 아이피가 아닌 다른 아이피로 구글에 접속하려 하면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구글에 로그인이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의 정보를 구글이 요구하는데 바로 여기 등록한 전화기(전화번호)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크롬에서
로그인한 뒤
프로필사진(등록하지 않았다면 둥근 원 안에 자신의 이름이 써진)을 클릭하면
이와 같은 창이 뜨고 가운데에 있는 구글계정을 누르면 다음의 창이 나옵니다.
왼쪽 아래에 보이는 휴대전화 찾기를 선택하고
기기를 선택합니다. 두 개가 뜬 이유는 전화번호가 아닌 기기를 찾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구글 계정 등록할 때의 기기가 G3였거든요. 번호 그대로 기기를 V30으로 바꾸었는데 둘 다 뜨네요. 기기 선택하면
이 창이 뜨고 이제 원하는 작업 하시면 됩니다. 벨소리 울리기를 했더니 진동으로 설정한 상태에서도 벨소리를 울려 주네요. 화면 잠금을 할 때까지.
2018년 8월 8일 수요일
테니스
없어져야 하는 운동경기.
심판 14명, 볼보이 6명. 볼보이 하는 일은 볼을 줍고 볼을 선수에게 주고 양산 씌워 주고 수건 주고 쓰고 던지는 수건 받아 챙겨두고... 이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완전히 노예 교육을 받은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은 매너 좋기로 이름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그 선수이고 볼보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평소 갖고 있는지 이 장면 다음으로 옆에 앉혀 자신의 음료를 나누어 주고 나란히 앉아 함께 마시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은 드물고 중계방송 보면 속이 뒤집히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운동경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심판 14명, 볼보이 6명. 볼보이 하는 일은 볼을 줍고 볼을 선수에게 주고 양산 씌워 주고 수건 주고 쓰고 던지는 수건 받아 챙겨두고... 이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완전히 노예 교육을 받은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은 매너 좋기로 이름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그 선수이고 볼보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평소 갖고 있는지 이 장면 다음으로 옆에 앉혀 자신의 음료를 나누어 주고 나란히 앉아 함께 마시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은 드물고 중계방송 보면 속이 뒤집히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운동경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2018년 8월 4일 토요일
생각과 행동
학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따금 이야기합니다. 각자 가치관과 지향점이 다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하며 제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이들 학교에 보내면 도덕선생들(거의 모든)이 집의 가훈을 알아 오라고 숙제를 냅니다. 난 없다. 할아버지도 만들지 않으셨고 나도 그러니 니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래도 가져가야 한다고 떼를 쓰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를 가져 가라고 합니다. 에이 그게 뭐냐고 대들면 네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아무 말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한 것도 나쁘다고 판단한 것도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그 실천은 그 가치를 실현하는 쪽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애완동물을 키운다든지 산을 좋아한다며 등산을 하는 것 처럼. 이 실천은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실천입니다. 옳은 실천이려면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산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고'로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점심으로 국수를 삶아 달랍니다. 두 말 없이 비빔국수를 만들어 줬습니다. 일부러 짜게 했다고 알고 먹으라고 했고 평이 없었습니다. 오이가 없어서 양파만 썰어 넣었다고 해도, 한 가지 더 넣은 게 있다고 해도, 더 넣은 것이 식초라고 해도 아무 말이 없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먹었기 때문에 다음에 또 하라고 하려고 맛이 없어도 그냥 먹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이해되지 않은 게 그 다음입니다. 숨 넘어가게 딴 세상을 보여 줘도, 맛있는 점심을 먹여줘도 고마운 중 알아야 하는데(테이크했으면 기브해야 하는데) 좋으면 더 요구하는 것입니다. 빨래 돌리고 설거지하고 점심 전에 바람 쐬었던 이불을 일부 정리해서 빈 자리에 빨래 널고 자리에 앉아 밀린 숙제인 손톱을 깎는데(이발이랑 손톱깎는게 왜 이리 싫은지) 자신 손톱을 깎아 달랍니다. 무시했더니 투덜댑니다. 한 때 깎아주던 때도 있었는데 '존경'이라는 것을 거두며 없앤 서비스 목록입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보더니 신문보는 내게(토요판은 완독합니다) 심심해서 재미 없답니다. 영화를 보러 가잡니다. 뭘하냐고 물으니 신과함께와 미션임파서블 한다면서 그것 뿐이냐고 물으니 답이 불문명해서 검색해 보니 여수의 세 개 영화관 모두 똑같이 이 두 개만 상영하고 그 중 하나는 맘마까지 셋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션임파서블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 꼴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선거 때와 같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의 차선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러 가니까 저런 나쁜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는 게 미리 차단되어 있다는 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면 보지 않아야지요.
신문을 읽다 김호철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참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꿋꿋이 살아(견뎌) 오면서 자신도 아팠고 지금은 그의 부인이 아픈데 금전적으로 힘들다는 기사를 보고 공개된 계좌로 50만원을 보냈습니다. 그 생각이 나서 모금상황을 검색해 보았는데 관련 내용이 없는 걸로 봐서 목표액에 아직 미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금 기간은 이미 끝났는데 말이 없으니.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네 탄핵국면에서는 촛불들에게 앞장서서 불을 질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금액이...
여러 해 전에 창진형과 싸운 적 있습니다. 노동운동 하면서 처음엔 각을 세웠지만 내가 제자리 잡으면서 서로 돕기도 하고 그에게 일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노선은 확연히 다르지요. 그에게 노선이란 게 없으니. 92년 대선 때 난 백선생을, 전교조는 대놓고 디제이를 밀었습니다. 나를 믿고 백본부에서 보낸 홍보물을 책장 뒤에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래도 그는 해직 기간 견디고(그게 비해직자의 힘으로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여수 대표적이고 가장 큰 시민운동단체를 이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민중의 힘을 아직은 믿고 있던 때 시민협의 타협적인 사업들을 지적했습니다. 그 때문에 미적지근한 개혁으로 만족하고 대중은 투쟁성을 잃는 거라고. 그랬더니 바로 발끈했습니다. 나는 그거라도 하는데 넌 하는 게 뭐냐는 것이었습니다. 전교조 노선문제로 싸우고 탈퇴한 때였거든요. 나의 현장은 학교이고 내 일은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사회에 어떤 자세로 나가 살아야 하는지를 매 순간, 매 이슈마다 이야기한다고 했드랬습니다.
그는 선거에 한 번 나가 실패한 뒤 그를 당선시켜 줄 선거인들과 여러 번 맞짱 뜨고 아직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고 열심히 나름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이전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항상 있어야 하구요.
아이들 학교에 보내면 도덕선생들(거의 모든)이 집의 가훈을 알아 오라고 숙제를 냅니다. 난 없다. 할아버지도 만들지 않으셨고 나도 그러니 니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 그래도 가져가야 한다고 떼를 쓰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를 가져 가라고 합니다. 에이 그게 뭐냐고 대들면 네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아무 말이나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한 것도 나쁘다고 판단한 것도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그 실천은 그 가치를 실현하는 쪽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애완동물을 키운다든지 산을 좋아한다며 등산을 하는 것 처럼. 이 실천은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실천입니다. 옳은 실천이려면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산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고'로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점심으로 국수를 삶아 달랍니다. 두 말 없이 비빔국수를 만들어 줬습니다. 일부러 짜게 했다고 알고 먹으라고 했고 평이 없었습니다. 오이가 없어서 양파만 썰어 넣었다고 해도, 한 가지 더 넣은 게 있다고 해도, 더 넣은 것이 식초라고 해도 아무 말이 없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먹었기 때문에 다음에 또 하라고 하려고 맛이 없어도 그냥 먹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이해되지 않은 게 그 다음입니다. 숨 넘어가게 딴 세상을 보여 줘도, 맛있는 점심을 먹여줘도 고마운 중 알아야 하는데(테이크했으면 기브해야 하는데) 좋으면 더 요구하는 것입니다. 빨래 돌리고 설거지하고 점심 전에 바람 쐬었던 이불을 일부 정리해서 빈 자리에 빨래 널고 자리에 앉아 밀린 숙제인 손톱을 깎는데(이발이랑 손톱깎는게 왜 이리 싫은지) 자신 손톱을 깎아 달랍니다. 무시했더니 투덜댑니다. 한 때 깎아주던 때도 있었는데 '존경'이라는 것을 거두며 없앤 서비스 목록입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보더니 신문보는 내게(토요판은 완독합니다) 심심해서 재미 없답니다. 영화를 보러 가잡니다. 뭘하냐고 물으니 신과함께와 미션임파서블 한다면서 그것 뿐이냐고 물으니 답이 불문명해서 검색해 보니 여수의 세 개 영화관 모두 똑같이 이 두 개만 상영하고 그 중 하나는 맘마까지 셋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션임파서블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 꼴 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선거 때와 같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의 차선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러 가니까 저런 나쁜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골에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는 게 미리 차단되어 있다는 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면 보지 않아야지요.
신문을 읽다 김호철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참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꿋꿋이 살아(견뎌) 오면서 자신도 아팠고 지금은 그의 부인이 아픈데 금전적으로 힘들다는 기사를 보고 공개된 계좌로 50만원을 보냈습니다. 그 생각이 나서 모금상황을 검색해 보았는데 관련 내용이 없는 걸로 봐서 목표액에 아직 미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금 기간은 이미 끝났는데 말이 없으니.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네 탄핵국면에서는 촛불들에게 앞장서서 불을 질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금액이...
여러 해 전에 창진형과 싸운 적 있습니다. 노동운동 하면서 처음엔 각을 세웠지만 내가 제자리 잡으면서 서로 돕기도 하고 그에게 일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노선은 확연히 다르지요. 그에게 노선이란 게 없으니. 92년 대선 때 난 백선생을, 전교조는 대놓고 디제이를 밀었습니다. 나를 믿고 백본부에서 보낸 홍보물을 책장 뒤에 감추어 놓았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래도 그는 해직 기간 견디고(그게 비해직자의 힘으로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여수 대표적이고 가장 큰 시민운동단체를 이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민중의 힘을 아직은 믿고 있던 때 시민협의 타협적인 사업들을 지적했습니다. 그 때문에 미적지근한 개혁으로 만족하고 대중은 투쟁성을 잃는 거라고. 그랬더니 바로 발끈했습니다. 나는 그거라도 하는데 넌 하는 게 뭐냐는 것이었습니다. 전교조 노선문제로 싸우고 탈퇴한 때였거든요. 나의 현장은 학교이고 내 일은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사회에 어떤 자세로 나가 살아야 하는지를 매 순간, 매 이슈마다 이야기한다고 했드랬습니다.
그는 선거에 한 번 나가 실패한 뒤 그를 당선시켜 줄 선거인들과 여러 번 맞짱 뜨고 아직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고 열심히 나름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이전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항상 있어야 하구요.
2018년 8월 1일 수요일
나는 누구인가, 어떤 입장인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아침에 신문을 읽다가 이 시조가 보이는 순간 속이 확 끓어 올랐습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누가 쓴 지 모르는 게 맞답니다. 순간 열이 오른 건 이 시조를 쓴 사람의 현재의 자세가 눈앞에 사실적으로 펼쳐진 때문이었습니다. 의관 정제하고 곰방대 물고 문앞에 기대 누워 밖을 바라보는 모습.
근데 이과인 내가 이 시조를 온전히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언젠가 교과서에 나와 있었기 때문인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화가 더 올라옵니다. 왜 이 나이의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이 시조를 가르쳤냐는 것입니다. 해가 이미 뜨고 종달새도 먹이활동 나섰는데 소 먹여야 할 노비 놈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냐고 꾸짖고 거기다 재 너머 저 큰 밭은 언제 갈 건지 한심하다고 혀를 차고 있는 이 글을 그 나이의 대한민국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뭐라고 가르치려 교과서에 실었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것만 '빨리빨리'를 주장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게으름을 피우는' 그런 국민성을 세뇌시키는... 양승태가 박정희한테 배웠네요, 그러고 보니.
게다가 더 열받는 건 이 시조에 대한 해석입니다.
1. 봄을 맞아 농촌의 생동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농사일을 재촉하는 권농의 뜻을 담고 있다.
2. '동창이 밝았느냐'는 농촌 사람들의 부지런한 생활이 잘 나타난 시조입니다. 날이 밝았는지도 모른 채 자고 있는 아이를 향해, 지은이는 밭을 어서 갈아야 한다며 서두르고 있습니다.
종달새의 노랫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바쁘고 생기 넘치는 농촌의 아침 풍경이 잘 그려집니다.
종달새의 노랫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바쁘고 생기 넘치는 농촌의 아침 풍경이 잘 그려집니다.
(1)의 해석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서적 해석이고 (2)의 해석은 소년조선일보 올해에 나온 해석입니다. 하, 정말 이런 선생님들 뿐인 이 땅에 올바른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채워질 수 있을까요. 요새 대법원(양승태 뿐 아니라 김명수도) 하는 짓을 보면 얘들은 '민주'는 커년 '공화정'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라는 겁니다. 삼권분립이 공화정 수립의 존재가치이고 그 삼권 중 하나인 사법부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행정부 수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런 사회지도층인사를 가진 대한민국. 당신은 민주공화정을 믿습니까? 내 피를 흘려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 바르지 않은 일에 항거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야 하며 옳은 것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의미있는 것이 되고 사회의 변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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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즉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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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다'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사전에는 없는데 뜻풀이에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 날이 새면서 동쪽 하늘이 훤해지다'로 풀이 합니다. 그러면 제목에 쓴대로 동트기 전이 제일 어둡다고 말한 것이 맞는 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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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사기는 빨리도 사라져갔습니다. 가리방이라고 했는데 어감상으로 일본어인 것 같습니다. 발령을 받았을 때 이걸로 문서를 인쇄하고 시험문제를 냈습니다.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2번의 기름종이엥 1번의 쇠판 위에 올려 3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