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단 하나만 빼고. 금방 한 말, 모든 게 변한다는 말.
요새 국민의 짐에서 '과학'이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쓰지만 그들은 과학이라는 게 얼마나 가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학이라는 게 측정과 관찰, 그리고 경험에 의거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거지요. 오차가 반드시 동반하게 되고 백만번째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말입니다.
과학이 이럴 진데 인문에서는 두 말할 필요 없습니다. 도덕과 가치가 시대에 따라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당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도 현재를 사는 우리는 눈으로 그걸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는 어떨까요.
중국 한나라 초기에 금고문 논쟁이 있었습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법가사상을 기반으로 통치이념을 잡았는데 군현제 때문에 정치적 기반을 상실한 귀족과 과거 제후 무리들이 유생들을 움직여 과거의 예법과 유교를 앞세워 지속적으로 황제의 통치행위를 비판하고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이사의 청을 받아들여 진서秦書와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사릅니다. 이것이 분서갱유 중 '분서焚書'입니다. 이것 때문에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책들 뿐 아니라 각 나라의 역사서도 사라지게 됩니다.
한나라가 뒤에 개국하고 법가 사상을 버리고 유가사상을 통치이념을 삼으려 하는데 백성들을 가르칠 이념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무제가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복생'이라는 사람을 찾아 냅니다. 진나라 사람인데 분서 때 '상서'를 감추어 두었다가 그걸 공부하여(당시는 외운 것이겠지요) 한나라가 성립하자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유교 경전을. 불러 오라 했는데 90세가 넘어 올 수 없다 하여 관리를 파견해서 구술을 받아 적어 경서를 복원합니다. 그것이 금문상서今文尙書입니다. 그 책을 바탕으로 오경박사들이 유가사상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오래된 책 무더기를 발견하는데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벽에서 유교의 고문서들이 나옵니다. 고문상서古文尙書입니다. 금문은 지금의 문서라는 것이고 고문이라는 것은 그 때의 문서라는 뜻이겠지요. 당연히 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금문은 한 사람의 기억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미 금문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권력을 획득한 뒤라서 사실의 진위를 놓고 대논쟁이 벌어집니다. 승자? 짐작한 대로입니다.
'공화共和'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못지 않게 기가 막힙니다. 중국의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가 서양에서도 인정할 만큼 역사서의 기본입니다. 거기에는 주나라의 후반기 여왕이 폭정을 해서 신하들에게 쫓겨나고 제후들의 추천으로 '주정공'과 '소목공' 두 신하가 협의하여 정치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 시기를 '공화시대'라고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진晉나라 때 도굴에 의해 뜻하지 않은 발견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죽간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게 위魏나라(전국시대) 역사서인 위서魏書였습니다. 편년체로 역사를 대나무에 편년체로 기록하였다고 해서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기에는 내용이 다릅니다. 여왕이 쫓겨나고 제후들의 추천을 받은 '공백 화共伯和'라는 사람이 왕의 역할을 대신하였다는 것입니다. 짐작하자면 공나라의 대부 '화'라는 사람인 것입니다.
* 여기서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위의 '공백화'에 대한 설명은 내 개인의 생각입니다. 한문은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서를 공부할 때 스승이 먼저 읽은 뒤 제자들이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띄어 읽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힘들고 띄어읽기가 달라지면 잘못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도 그냥 共伯和로 씌어 있어서 어떤 해석한 사람은 공 다음을 띄어서 공나라 사람 '백화'라고 한 것도 있습니다. 공나라까지는 맞고 그 다음의 '백伯'인데 원래의 뜻은 맞아들이고 역사의 기록을 보면 작위입니다. 예를 들면 주나라 문왕은 '서백'입니다. 백작인 건데 시대별로 다르기도 한데 주나라는 '왕'이고 그 다음으로 큰 나라의 제후는 '공'이라 했고, '공'이 '후'를 봉하고, '후'가 '백'을 봉합니다. 가장 작은 나라단위의 지배자인 거지요. 나는 그걸 '대부'급으로 본 것입니다. 전국시대 시작인 진나라가 조위한의 삼국으로 쪼개질 때도 '대부'들이 그렇게 한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내 해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내 해석이 들어간 것은 힘있는 학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기록이 맞겠습니까. 사마천은 분서로 역사서라고는 '진서'만 남아서 그를 바탕으로 당시 역사를 기록할 수밖에 없는데 당시의 진나라는 서북쪽 변방에 치우친 나라였기 때문에 중원의 일에 모를 수도 있고 자세히 알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부분의 기록이 비어 있는 것을 사마천이 개인의 추측으로 집어 넣은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학자들도 죽서기년은 위서僞書이고 '사기'가 정서라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공화기기의 청동기가 발견이 되었는데 거기에 '공백 화'라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 것입니다. 게임 끝? 그래야 맞겠지요? 기득권을 갖고 목을 세우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 그것도 판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