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가르는 기준으로 보통 동주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아니냐로 삼습니다. 주나라가 기원전 1046에 성립하고 유왕이 기원전 771년 죽으며 망하는데 왕족의 피가 살짝 튄 자가 낙읍(수도가 호경이었음)으로 도망가서 주나라를 잇게 되는데 그걸 앞의 통일 국가와 구분해서 동주라고 하고 그 앞의 통일 주나라를 서주라고 합니다. 여튼 서주가 망한 뒤 여러 나라로 쪼개진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합니다. 그랬어도 나라의 큰 일은 형식적으로 주나라의 승인을 받았고 형식적으로 조공도 보냈습니다, 이 시기 쪼개어진 나라는 3백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동주의 힘이 점점 쪼그라들어 나중에 그 나라를 무시하고 서로이 침략전쟁을 통해 나라 수가 줄어 가는데 이 때를 전국시대라고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기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교쟁이들은 공자가 죽은 해를 그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춘추' 때문입니다. '사서오경'할 때 춘추가 사서에 들어가는데 이게 공자가 쓴 역사서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적 있는데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1년을 여름과 겨울을 빼고 봄, 가을만을 따져 '春秋'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른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공자는 역사서의 이름을 '춘추'라고 했고 이 이름을 역사서의 이름으로 쓴 사람이 죽었으니 춘추시대의 끝이라고 보는 게 맞다는 게 유교쟁이들의 말인 것이지요.
하지만 역사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晉나라가 망하고 '조, 위, 한'이 성립한 해인 기원전 453년을 그 기점으로 봅니다. 이유가 간결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는 신분사회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신해혁명 전까지. 그들의 최고의 우두머리인 황제는 천자라고 했습니다. 天子. 하늘이 내린 씨앗이고 그 피가 아니면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나라가 망하고 진광과 오승이 일어날 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고 한 건 그 자들이 도둑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전국시대를 통일로 이끈 진나라의 시대이건 그 뒤건 엄격한 신분사회이고 공자는 그것을 '예禮'라고 하여 나라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공부하고 싶으면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여튼.
신분이 명확한데 어느 정도였냐. 형刑은 대부이 이르지 아니하고 예禮는 서민에 이르지 않는다. 아주 간결하지요? 일반 백성은 예를 지킬 필요 없고 대부 이상은 일반 형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계급은 이렇습니다. 공경대부. 나머지는 서민(서인). '공'은 公이고 제의 환공, 진의 목공 따위의 바로 나라의 왕, 제후를 말합니다. 춘추5패에 '공'이 아닌 한 인물이 있는데 초의 장왕입니다. 남쪽에 쳐져 있어 오랑캐 취급을 받았지만 그 덕에 힘을 키울 수 있어서 동주 황제를 직접 위협하기도 하던 오만방자함으로 자신을 '왕'이라고 한 것이 예외입니다. '公'인 제후가 최고의 관리자로 임명하여 나라 정치를 한 신분이 '경卿'입니다. 그리고 하급 실무 관리가 '대부'입니다.
이 대부였던 '한, 위, 조'씨가 반란을 일으켜 왕족를 무찌르고 진나라를 깨고 각각의 나라로 독립한 사건이 전국시대를 가르는 시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왕족의 피가 아닌 일개 대부에 불과한 신분이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게 깔끔한 정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