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사상을 보면 항상 목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禮에 대한 그들의 신념. 곧 죽어도 공자는 '예'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고, 맹자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예'에 대한 생각을 간추려 봅니다. 먼저 당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형벌은 대부에 이르지 아니하고, 예는 서인에게 이르지 않는다.
계급 구조를 또 잠깐 이야기합니다. 하상주에 이어 춘추전국시대까지는 지배자의 최정점이 '왕王'이었습니다. 황제의 개념은 전국시대를 끝낸 진나라 때 나옵니다. 그래서 진나라 왕 영정의 시호는 '시황제'인 것입니다. 왕은 공신들에게 봉지를 하사합니다. 그들이 제후이고 '공'입니다. 제의 환공, 진의 문공 할 때의 그건데요, 제후국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것입니다. 헷갈이는 게 춘추오패 중 '초의 장왕'이 있는데 남쪽 오랑캐라서 지들이 제일 힘이 쎄다고 함부로 '왕'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덩치가 커지니까 제후들이 다시 봉지를 나누어 주는데 그 봉지를 받고 다스리는 이들이 '경'입니다. 춘추 말기 '진晉'나라에 '6경'이 나오는데 그들이 싸우면서 세 개의 성씨만 남아서 진나라가 '조, 한, 위'로 쪼개어지는데 이 때부터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로 접어든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면서 더 커진 덩치들이 이제는 '경'이 '대부'에게 다시 땅을 나누어 주고 이 재산을 다룰 실무집단이 생기는데 그들이 '사師'집단입니다. 공자도 이 계급입니다. 설명이 길었는데 간추리면 왕-공-경-대부이고 그 아래가 평민인데 그들을 그 때는 서인庶人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것으로 돌아갑니다. 대부 이상은 형벌을 받지 않고 서인들은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계급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고 바로 '성선설'을 나중에 이름 붙이는 이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인지상정으로 날 때부터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형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논어 위정편에 있는 말입니다. 법을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은 처벌을 면해도 수치심이 없고,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다스리면 백성을 수치심이 있고 감화도 받는다.
여기서 '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의 위치가 이런 개념을 생각하게 한 것 같습니다. 위에 당시 계급을 설명한 것처럼 새로이 탄생한 '士'라는 계급인데 그가 그 계급이었고 말 잘하는 이들은 그걸 부국강병책이라며 각 나라를 돌며 제후들을 가르치는 역할까지 했으니 참으로 애매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공자가 말할만큼 다독거린다고 착해질 상황이 이미 넘어서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제안을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아 '상갓집의 개'로 떠돌다 아무 소득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유가 사상은 진나라를 까뜨린 한나라 초기에 잠시 쓰이다가 도가에 밀려 저 뒤에 묻힙니다. 그러다 잠시 송나라에서 부활하고는 중국 역사상 거의 쓰이지 못합니다. 전국시대 말기데 진나라는 상앙(위앙'을 재상으로 맞아 법가 정신으로 백성들에게 테자마저도 법을 따르지 않으면 똑같이 처벌을 받으며 당연히 벼슬아치들이 법에 어긋나게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법대로 처벌을 하면서 엄청난 국력 신장을 이루고 그것이 서쪽 변장의 오랑캐에 가까운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종료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그 이치를 알게 된 진의 '영정'은 법가의 '이사'를 등용하며 결국은 중국을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진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한나라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어서 법가의 정치를 혹독한 것으로 진시황제를 폭정을 한 지도자로 본 것이구요.
어떤 철학이 모든 시대를 관통하며 옳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진시황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에 맞는 철학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위대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사족을 들자면 '공양지인'을 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