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0일 월요일

재치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의 품위를 더 고민합니다. 진실성에 더해 부드러움과 추가로 재치를 장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력은 하는데 그다지 늘지 않습니다. 동네에 이런 입간판이 섰습니다.



2020년 3월 19일 목요일

걷기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체중이 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늘었던 때 빼고 몸무게를 잰 역사상 61kg 가보지 못했는데 62에 육박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맘먹고 걸었는데 빌목도 무릎도 뻐근합니다.

글쓰기

  글쓰기를 하려면 관찰력과 비판력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느끼는 것을 따져보지 않으면 모든 것이 평이해서 자신의 느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바쁘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애정을 가지고 사물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현상은 냉소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어제 학교에 갔다가 꽃들을 보면서 그 동안 내가 무심하게 살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년에 보았던 꽃들이지만 올해 같은 꽃도 아니며 내 느낌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현듯 생각한 것입니다.


기생화로 기억합니다. 잘못된 기억입니다. 명자나무가 맞습니다.


버들강아지입니다.


벚꽃이 이렇게 진한 색인 건 처음 봅니다.

2020년 3월 9일 월요일

신이 존재할 수 있는 터전

  앞에서도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을 마귀로 믿고 치료제가 아닌 기도로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범주만 불합리한 게 아닙니다. 귀신, 혹은 유령이 사람에게 물리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양 모두 죽으면 영혼이 껍데기를 두고 나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영혼은 물리적인 어떤 것도 갖지 못하므로 물질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 기초 상식적인 물리학입니다.
  13층의 높이인데 한낮에 시커먼, 큰 게 지나가니가 크게 놀랍니다. 정말 심하게 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수공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의 그림자라고 하니 이해 합니다.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일입니다. '아니다, 이건 진짜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건 모자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칠은 이십칠'이라는 것을 바로잡아주려는 것은 오지랖이 아닌 자기자장인데 세살배기한테 자본론 가르치려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걸 믿는 사람이 많으니 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성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은 그 범주에 최소한 들어가지 않을까요?

사진 비율

  발령을 받고 제일 먼저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것이 사진이었습니다. '카드는 빚'이라는 생각이 확고했고 절대 빚을 져서는 것도 불변의 가치였지만 사료고 했던 미놀타300의 가격이 한 단 월급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어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년 할부로 기억합니다. 많이 찍으러 다녔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고 나중엔 어쩌다 손에 들어 온 내일모래하는 스쿠터 핸디50을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진의 기본을 익혔고 인물로 공부단계를 올리면서 열기가 식었습니다.
  생물학적인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가로세로의 비율은 얼마일까요. 정오각형 별에 푹 빠져 황금비가 진리인 것으로 믿었던 다빈치와 그의 추종자(지금까지도 무지 많은)들은 1:(1+root5)/2의 대략의 근삿값 1:1.6을 거의 신처럼 떠받드는데 그게 제일 매력적인 비율일까요.
  증명사진의 비율은 3:4이고 일반적인 모니터가 나왔을 때 비율은 800*600이었습니다. 이 둘 중 3:4의 비율은 예쁘다고 보이지 않고 경직되어 보입니다. 대부분 일상에서 보이는 직사각형의 것들은 4:3에 가까운 비율이 제일 편안하고 예쁘게 보입니다. 1:1.33. 가로가 넓어야 안정되어 보입니다. 편안한 거지요.
  그거와 시선을 달리하는 게 영화 화면입니다. 처음엔 정사각형, 그러니까 1:1의 비율이었던 것이 화면에 속도를 담아내기 위해 가로의 비율이 늘어나게 됩니다. 텔레비전 시절 컴터 모니터의 비율이 앞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800*600이었던 것이 16:9로 가로의 비율이 늘어나다가 지금은 2:1이 되었는데 이것은 빠른 속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인간에게 매력적인 비율은 아닙니다.
  물론 사진기로 찍어 인화하는 규격도 이에 따릅니다. 내 폰의 카메라는 2:1로 설정되어 있네요. 그런데 인화지 규격을 검색해 보니 인치로 5:4(10:8) 규격인가 보네요. 여튼 가로의 비율이 커야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 하프사진기라는 게 나왔습니다. 필름값을 아기기 위해 필름 한 장을 둘로 나누어 쓰는 겁니다. 그러면 생기는 일이 5:4의 비율은 2.5:4의 비율로 세로의 비율이 훌쩍 커지는 문제가 생깁니가. 그냥 세로비율이 커지는 정도가 아니라 5:4라면 1.25:1정도인데 2.5:4라면 1:1.6으로 뾰족하다고 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해상도가 절반으로 떨어지구요. 예쁘지도 않은데다 앨범에 끼우려면 문제가 생깁니다. 인화한 사진을 끼우는 앨범의 각 페이지의 기본 틀이 이랬거든요.


  이러다 보니 사진을 찍을 때 가로세로의 비율의 사진 개수를 어림 짐작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고 가로가 석장, 세로가 두 장이니까 잊지 않고 사진기를 세워서 찍으려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지요.

말의 뿌리

  작년 재작년 급부상한 축구선수 별명이 '뽀시래기'라고 한대서 '어원을 쫌 따져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사투리로는 '뿌시래기'인데 원래의 말인 '부스러기'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낭도에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들이 그 시기에 '뽈똑'이 맛있다고 해서 한참을 캐물어 확인해 보니 보리수의 열매를 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열매가 희끗희끗한 점들이 박혀 있어서 '파리똥'이라고 불리던 것이 우리 동네에서는 자연스런 전라도 사투리 변화로 '포리똥'으로 불렀는데 이게 이렇게 변해간 것이었습니다.
  같은 말이 지역별로 달리 쓰이는 게 있다고 하지만 어원을 살펴 쓰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서 '땡땡이 친다'는 게 수업 빼먹는 것을 의미하는 건 이치가 있어 보이지만 경상도에서 의미하는 것 생뚱맞아 보이는 것도 있잖아요.

2020년 3월 8일 일요일

화분 정리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죽은 것을, 죽어가는 것을, 시든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옴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조차 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는 항상 느낍니다. 그래서 아예 키우지 않으려 하는데 가끔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은 몇 년 전에 학생들 스투키를 만들 때 화분 하나를 만들었고 그게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이 식물은 원래의 모양과 달리 가지를 친 새 순들이 나왔고 원래의 죽순 같았던 것들은 모두 죽어 뽑아 냈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온 것들은 화분이 주체할 수 없게 무성해졌습니다. 언제부터 분갈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전에 난초 분갈이를 하고 무두 죽였던 것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 용기를 냈습니다. 죽어도 어쩔 수 없지요.




2020년 3월 3일 화요일

세대의 차이?

  피시가 교실에 등장하면서 수업교재의 개발이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고 그것은 당연히 그림파일의 확보였습니다. 궤도와 슬라이드 정도에 머물렀던 보조 자료들은 화질이 낮았지만 프로젝션 티비로 보여주는 그림자료가 확실히 더 나은 수업효과를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모니터의 화질도 좋아지고, 보급된 피시의 성능이 486 이상이 되면서 윈도우(맥에 비하면 쓰레기지만)가 운영체제로 안착이 되면서 그림에서 동영상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수업자료는 컴터를 잘 다루는 교사의 것과 그렇지 못한 교사의 것으로 급이 달라지게 됩니다. 컴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교사들은 멀티미디어 자료를 아예 쓰지 않는 사람도 있고 남의 것을 가져다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있지만) 남의 것은 자신의 수업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당연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듭니다. 차이가 없다면 학원식 수업, 그러니까 문제풀이의 보조도구로 쓰일 뿐이었겠지요.
  그래서 요즘 학생들은 그림이나 소리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동영상에만 반응하며 그림에 반응하는 경우는 웹툰처럼 그림이나 텍스트가 거칠고 맥락이 없게 어수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데 그런 수단으로는 정적인, 제일 정적인 '수학'을 공부하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서도(체험, 만들기는 많이 양보해도 중학교까지) '체험수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들기 수업을 하고 그들이 뛰어난 교사인 것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것은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다루기 힘든 고차원 수학이며 그들이 만든 것으로 수학의 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수학에 흥미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과정상의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티비를 보다가 자막을 보면서 울컥했는데 영상이 아닌 자막에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과거 텍스트 세대여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봤는데 그런게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목에 '?'이 붙은 겁니다. 요즘엔 웬만한 프로그램엔 재치있는 자막을 붙이고 오락프로그램에는 출연자의 감정을 이미지 자막으로 화면 가운데 배치하고 아래로는 또 자막을 붙이기도 하니 이건 텍스트 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고 게임과 채팅을 동시에 하는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드는 겁니다.
  그러면 세대의 차이는 뭘까요. 영상을 볼 때 지나가고 있는 세대는 내용을 정리하고 의미를 찾는 반면 지금 이 세대는 그냥 그 순간을 즐기고 만다는 게 지금까지 세대를 살펴보고 있는 내가 판단한 것입니다.

공포의 확대

  꽃피는 봄이 오면 내곁으로 온다고 했지 노래하던 새들처럼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이 났습니다.


  2주 전인 2월 15일 그것도 건물에 가려진 곳에 핀 매화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 지난 3월 2일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등장한 손소독제입니다.


  전번 주 조심해야겠다고는 생각하면서 순천을 가려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시외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기피할 것 같아 마스크를 사려고 들어간 약국에서는 '없다'였습니다. 질문은 "마스크 살 수 있어요?"였는데 뉴스에서 사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약국이 아직 있습니다. 다음의 약국에서도 '마스크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였고 혹시 몰라서 '천마스크'있냐고 물으니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도 쓰지 않고서는 버스를 타지 않야야 하니 나들이 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포가 내 주변까지 휩쓸고 있습니다. 내가 걸릴 수 있다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확진자가 되면 2주간 이상의 과거 동선이 낱낱이 전국에 밝혀지는 상황이 훨씬 무섭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떳떳하다고 생각하지만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이 공포의 확산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내용을 주위에 퍼뜨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인정할 만한 곳에서 나온 내용인지가 그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시대의 무지로 인한 공포와 지금의 공포는 그 수준이 달라진 것 없다고 봅니다. 악마, 마귀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믿는 사람들, 기도로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람들부터 확이니되지 않은 나쁜 소식을 주위에 전파하는 일까지 인류의 문명은 발전했을지언정 지성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핀 꽃

    꽃이 두 가지 입니다. 잎사귀 넓은 건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닌 말똥풀이고 꽃은 꽃잎이 많은 게 민들레, 가지런하게 한 줄만 있는 게 좀씀바귀입니다. 쪼꼬만 게 화단에 많이 피어 있어 궁금해서 찾아보니 씀바귀와 같은 모양인데 아주 작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