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4일 화요일

점심시간의 배구

   여기에 처음 왔을 때 점심시간에 함께 모여 노는 건 없었습니다. 4교시가 12시10분에 끝나고 5교시가 12시55분에 시작하는데 그 정도면 이전 학교 경험으로 20분 넘게, 30분까지도 놀 수 있는데 급식을 만찬처럼 천천히 먹고 노닥거리다 오후 수업을 들어갔습니다. 먼저 내 반 아이들을 득달해서 축구를 시작했고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데 두 달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큰 학교는 운동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경쟁이 붙으니까 끌어내는 데 한 달 정도면 충분했는데 그런 게 없는 환경에서 내내 자란 아이들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못된 체육과가 전근 가고 올해 배구를 가르친 다음부터 축구가 푸대접을 받고 아이들이 배구만 하려고 합니다. 난 선출에게 배워서 규칙과 훈련, 실전을 원칙대로 알고 있는데 자꾸 한두 놈이 끼어들어와 자신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먼저 내게 배운 것과 다르니 아이들이 힘들어 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인간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잘난 체하려고 그러는 건 알겠는데 가르치는 게 내용이 잘못된 것을 아이들이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체육관에 들어 오면 알아서 서브연습을 하는데 연속 3회 성공하면 수비와 공격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30분쯤 되면 편을 짜서 시합을 합니다. 시작할 때 원바운드 3개 허용했는데 1개를 거쳐 전번 주부터 원바운드 없애고 6인제 코트에서 원바운드 없이 합니다. 3학년 여학생들이 오지 않아서 11명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점심 때 자주 빠지니까 항상 하는 아이들과 실력차가 나고 그러다보니 아예 나오지 않는 거죠. 팀을 가를 때 주먹가위로 하는데 시간도 많이 들 뿐 아니라 잘하는 놈들이 패턴을 만들어서 몰려다녀 편을 만들어서 제비를 만들었습니다. 체육관에 들어오면서 하나씩 뽑으라고. 뭘로 제비를 만들 건지 교사 안팎을 세 차례를 돌면서 선택한 것이 요것입니다. 개나리 나무인 것 같습니다. 절반을 아랫 부분 껍질을 벗겨 내고 색칠을 하였습니다.





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어떤 사회가 올까요

   아침 신문에 강준만의 종이신문에 대한 칼럼을 읽었습니다. 전에 이미 블로그에 올렸던 그 사건(!)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어서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매년 하는 한국미디어패널조사의 결과인 건데 2019년 4,583가구 10,8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로 2020년 4월 15일 발표한 것입니다. 제목은 신문기사 이용자 특성 분석.




  아예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 줄 몰랐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몰라도 된다는 건지 신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잇다고 자신을 하는 건지 이건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치는 관심을 가져야 할 일 아닙니까.




  이 데이터도 재미있습니다.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강준만이 다룬 건 이 데이터였습니다. 종이신문은 노인들의 것이라는. 


  신문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사회를 이해한다는 건 이해가 어렵습니다.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이 방송의 뉴스를 본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고, 책을 통해 얻는다는 건 개인적인 편향에 빠지는 일입니다. 신문도 읽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앞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종이신문은 여러 단계의 팩트체크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가짜 뉴스에도 그 회사의 입장이 논리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수단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그러든 말든 종이신문은 그래프에서 보듯 사라져 가는 게 확실히 보입니다.

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평등

   예수가 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장터에 가서 여러 차례 일꾼을 데려다 썼는데 그들 모두에게 1데나리온(당시 하루 품삯)을 약속하였답니다. 일이 끝나고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약속대로 1데나리온을 지급하였는데 맨 먼저 온 사람도 같은 품삯을 받자 항의하였다고 합니다. 주인은 자신이 불의를 저지른 게 아니고 당신과 약속한대로 당신에게도 1데나리온을 지급하였다고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2천년 전의 그 분의 생각을 지금도 감히 '공정'이나 '평등'을 생각한다는 나도 따라가기 힘듭니다. 20대의 보수는 무엇이고 의사들의 밥그릇지키기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또 진보를 고민함

 20대의 보수화는 확실한데 그 이유가 생각치 못한 것입니다. 복지가 진보의 중요한 상징의 하나인데 복지가 강화되면 소수 계층인 자신의 세대가 다수 계층(노인네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 때문에 복지축소의 방향으로 간다는 것. 이들에게는 기독교적인 동정도, 불교적인 자비도, 유교적인 긍휼은 커녕 사회적 의식은 눈곱만큼도 없네요.

  김기식의 칼럼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사민주의를 기반으로 주목받는 복지국가인 스페인은 거의 모든 시민이 세금을 내며 현금복지급여에도 세금을 물린다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그 생각을 따라간답니까. 노동자의 절반이 면세자이고 자영업자들도 지금보다 세율을 더 낮추고 고소득에만 세금을 더 물려 복지재원을 충당한다는 것은 '곡학아세'라고 선언하네요.

2020년 11월 18일 수요일

웅천 체험학습

 패러세일링





가방 만들기

   학부모 평생수업으로 숄더백을 만든다는데 3명만 온대서 함께 끼어서 했습니다. 자연스런 붓자국을 넣었는데 강사랑 기술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더니 강사가 열심이 자국을 지운다고 했는데 많이 남았습니다. 근데 난 결과물에 만족하거든요. 결과물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구요.





2020년 11월 16일 월요일

견지망월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 하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네.오느 고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그가 글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실망하니 그 사람에게 한 말이 가르침은 달이고 문자가 손가락인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한 말이랍니다. 신문 기사를 검색하다 눈에 띄는 게 있어 확인해 보니 본문은 없고 사과문만 있었습니다. 칼럼에 대해 신문사가 사과하고 글쓴 본인이 함께 사과하는 건 처음이어서 찾아보려 했더니 완전히 지운 뒤였습니다. 어떤 사람들 표현으로 옛날 사람(꼴통이겠죠)이어서 종이신문을 보기 때문에 어젯반에 전번 주 신문을 읽어보니 원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을 읽었는데 부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신문을 찢어 와서 스캔을 떴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을 읽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로 나는 생각됩니다. 자신의 가치판단으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것이지 아버지의 폭력을 어머니가 자초했다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여론을 지배하니까 뭐. 
 사과문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9146.html
사과문이 먼저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원문입니다.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금탑사

   전전번 주 일요일에 마누라 성화에 여행을 갔습니다. 단풍나무길이 유명하다는데 들어본 적이 없어 검색해 보니 비자나무 숲이 검색 되더라구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라는 판단이 들어 가보았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낙엽이 우수수!!!!



  거기서부터 절까지 간간히 교행로가 있는 외길인데 한참을 가니 절이 나왔습니다. 단풍나무 길은 그 길을 갈 때 있는 게 아니고 위의 느티나무가 있는 그 길에 있었습니다. 절은 삭축 위에 지어서 멋있긴 한데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절 아래에 비자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꽤 오랜 나이가 느꼊비는 나무들이었습니다. 몇 개열매를 주워 왔습니다. 




2020년 11월 1일 일요일

종교의 한계, 편협성

   나는 한 사람의 정치적 이념성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질문이 '준법정신'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판단하는데, 유죄라고 판단하면 상당히 큰 제약이 따릅니다. 매울 신辛자가 죄인에게 문신을 새기는 도구의 상형자라고 하는데 새기는 과정이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걸 새기고 이후의 삶을 사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미 현행법으로 처벌을 다 받고 출소하는 자를 이후로도 사회와 완전히 격리해야 한다는 것까지 이르면 그들은 보수의 가치까지 훼손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법을 먼저 고칠 일이지 준법을 외치는 사람이 법을 넘어선 벌을 주자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이르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내부에 머무르면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바람직하게 쓰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와 집단화하고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주장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도 보수라고 부를 수 없게 됩니다. 아침 뉴스에 그리스 정교회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걸 보고 그들의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유대교인데 거기에서 기독교가 파생합니다. 로마의 주종교였던 유대교는 신생 기독교를 핍박했고 콘스탄티누스가 공인(국교가 아닌 다른 종교와 같은 자격 부여)한 뒤로 반대로 기독교가 유대인을 차별합니다. 내용은 아는 바와 같이 일반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여 모두가 기피하는 걸로 먹고 살게 되는 데 그것 중 대표적인 것이 대부업이고 현대 금융업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7세기 이슬람이 갈라져 나옵니다. 중세를 거치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나며 가톨릭의 부패를 공격하며 신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종교의 특징은 어머니가 같음에도 자식들이 서로 원수 보듯 한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그들의 창시자를 모욕적으로 풍자하는 만평을 실은 잡지사 공격부터 아침 뉴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우러르는 대상을 모욕하는 일은 그냥 금기사항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로 선포합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은 아니었지만 로마에서 중세에 이르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하느님'에서 파생된 그 종파들은 모두 이렇게 해왔습니다. 종교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불교는 종파가 여럿이지만 싸우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견제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종교로서의 불교가 타락하기는 했지만.

  선가에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단하소불'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마조선사로부터 '천연'이라는 법명을 받아 단하쳔연으로 불립니다. 어느 겨울 산행을 나섰다가 추워서 절에 들어가 목불은 마당으로 가져와 쪼개어 불을 피웁니다. 그 절을 지키는 노승이 내려와 호통을 치니 '사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뒤지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자 노승이 나무에 무슨 사리가 나오냐고 대갈을 합니다. 천연은 씨크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되었구려."

  나무로 있던 것을 깎아 모셔두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따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자신의 숭배대상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따름입니다.

지금 핀 꽃

    꽃이 두 가지 입니다. 잎사귀 넓은 건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닌 말똥풀이고 꽃은 꽃잎이 많은 게 민들레, 가지런하게 한 줄만 있는 게 좀씀바귀입니다. 쪼꼬만 게 화단에 많이 피어 있어 궁금해서 찾아보니 씀바귀와 같은 모양인데 아주 작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