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자신도 모르게 배워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불변의 선한 가치인 것으로 자신도 모르게 각인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도덕 시간에 가치가 아니라 맞냐 틀리냐의 시험문제로 몸 안에 들어 온 것이라서 어떤 일에 대해 판단을 할 때 고민이 없습니다. 누군가 내 가족을 해치면 목숨을 걸고 복수해야 한다는 건 과거의 기준이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유일하게 힘이 되어 주는 건 가족이라고 의심없이 믿습니다. 항상 가족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가치관이 경색되어 있다가 스스로 철학, 그것도 동양철학을 공부하면 많은 혼란이 옵니다. 서양 철학자들이 색즉시공이나 상선약수를 알게 되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쓰레기라고 욕을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20세기, 21세기 유명한 철학자 여러 명이 그렇게 욕한 걸 여기 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철학 체계 속에서는 알 수 없고 다 내려 놓고 기초부터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신들의 철학을 기초로 판단을 하니까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는 것 이해합니다. 내가 개도에서 도덕 과목을 맡게 되었을 때 역으로 엄청나게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비겁하게 방법을 썼습니다. 수업의 대부분은 토론식으로 하고 시험 대비는 책 요약한 것 나누어 주고 거기서 나온다고.
내겐 별 거 아닌 건데 유퀴즈에 정현채라는 사람이 나와서 죽음학이라며 근사하게 이야기한 게 참으로 역겨워서 한마디 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한 게 언제부터 일까요?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명이 아직 시작되기 전에는 피를 흘린다는 건 죽음이고 피를 흘리는 것이 사냥이나 전투에서 생기는 것이어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한자의 형성 과정에서 보면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가 만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불교나 기독교의 생성 초기에는 없었다가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고 사후 세계를 만들어 천국으로 유도하도록 말입니다.
지능지수가 세 자리만 되면 사후 세계라는 것이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다는 것만큼 말이 안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외계인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후 세계도 죽어야 가는 곳이니 어쩐지 모르겠고 여튼 지어낸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김삿갓이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이라고 살고 죽는 건 한조각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 그대로 사실입니다. 단지 고통을 피하고 싶을 뿐 죽음 자체, 이승의 삶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왜 있겠습니까.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없기만 한다면 죽음이 고통일 리 없습니다. 누가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에 자신의 의지 없이 나타났으니 갈 때도 날 이승에 데려와 살게 했던 이가 데려 갈 것입니다. 이건 철학의 범주에 들지도 않습니다. 이번 시즌의 야구 경기도 오늘 야구 경기도 오늘 경기의 원아웃도 아닌 스윙스트라이크 하나 뿐일 수 있습니다. 초연? 웃기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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