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7

홍익인간?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 있을까요? 지금 대한민국은 국민연금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로 시끄럽잖아요. 그게 어려운 건 자신이 어떤 입장이냐에 따라 개선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 내야 하는지 얼만큼 더 내야 하는지 더 받아야 하는지 얼만큼 더 받아야 하는지가 입장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꿩먹고 알먹고라고 나온 의견에 정년을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노인들에게 일자라를 주고 그러면 세금도 더 걷고 연금도 더 내게 되니 해결된 것 아니냐고. 당연히 젊은이들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거라고 저항이 있어서 현재 정년연장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다면서도 시행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년을 65에서 60으로 줄이는 것은 저항이 있어도 했는데 다시 60에서 62로 기껏 2년을 되돌리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봅니다.

  모두에거 이로운 것은 재물이 무한정 공급될 때만 가능합니다. 경제적인 가치 혹은 이익은 총량이 정해진 쟁반 위의 사과입니다. 이건희의 아들이 편법을 써서 상성의 지배권을 가져갈 때 최소한 삼성물산의 다른 주주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았습니다.

  호랑이 떠난 골에 여우가 대장질 한다고 서울대 교수가 성추문으로 사라지니 택도 없는 게 일인자처럼 으스대고 억지 말을 하고 다닙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과 뷰티풀 마인드를 같은 반열에 놓고 설명을 텔레비전에서 했습니다. 정말 멍청한 의견입니다. 존 내쉬가 만들려고 했던 공식(완성도 못 했는데 노벨상을 받았는데)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만능 치트키 공식이었습니다. 수학이 위대한 것은 맞지만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손을 놓아야 그 손으로 중국을 잡는 것인데 둘 다 만족하는 수학공식을 만든다고 한 게 아름다운 생각이라니 수학을 ㄱ, 때위로 보는 사람이 유명 대학 교수라니. 존 내쉬야 노망난 늙은이를 미국이 알아서 키워준 거니 그를 비하하는 게 아니고 그냥 망령든 생각이지만 박형주는 다른 거잖아요.

인구 대책

   잘난 체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합계출생률이 0.7 밑으로까지 떨어졌다고 나라가 없어진다고 난리입니다. 하지만 인구의 감소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까지 세계 최고 인구를 자랑했고 산아제한까지 정책을 펴 인구증가를 막아왔던 중국도 이제 합계출생률 1이 되었다고 거기도 걱정입니다. 아 참, 그런데 거기서 뭔 잘난 체를 하냐구요?

  인구수가 줄어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노동인구가 줄어든다구요? 그러면 실업난이 해소되고 임금이 올라가니 경사가 난 거잖아요. 기업의 부담이 커진다구요? 당신이 기업인가요?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은 정반대로 간다는 걸 아직도 모르고 학교가 가르쳐 준 거짓을 믿고 있나요? 기업이 잘 나가야 경제가 성장하고 나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다고. 그렇게 가르친 선생이란 놈들도 쓰레기이지만 직장생활을 몇 년이나 한 사람이 아직도 그걸 믿고 있다면 그 자신도 문제입니다. 

  인구가 줄어들어 노동 인구가 감소하면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은 기업입니다. 앞의 말처럼 일할 사람이 줄어드니 임금이 올라가는 문제가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노동자의 이익이라고 했지요? 또 하나는 인구가 줄면 소비자가 줄어듭니다. 이건 앞의 문제보다 더 심각합니다. 자본주의의 경제라는 게 성장을 하지 않으면 망할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구 수도 줄어드는데 어제만큼 오늘도 살면 되지 않나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살고 싶어 하는 게 탐욕이란 생각을 하지 않나요? 그런 생각은 기업이 하는 생각입니다. 말로만 오늘 무탈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 풍요로워지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세계의 평화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소비가 줄어드는 건 기업에겐 사형 선고입니다. 소비가 줄면 창고에 재고가 쌓이고 생산량 줄이기 힘드니 창고가 가득 차면 공장 문을 얼마간이라도 닫아야 합니다. 직원을 쫓아내는 게 쉽지도 않지만 쫓아내면 창고의 물건을 사줄 사람이 더 줄어들게 됩니다. 1997년 외환위기에서 아주 명확하게 보았잖아요. 미국에서도 정리해고 한다고 난리였지만 모두 IT업계 전문가들이 그 대상이었고 제조, 생산 계통은 지금도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기준금리 내리지 못하잖아요.

  최소한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도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기업은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들 떠들지만 전문가라고 하는 놈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나쁜 경제학자들 혹은 사회학자 들입니다. 그냥 놔두면 기업들이 아이를 낳아도 자기 회사에서 어려움없이 키우며 근무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실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학교를 세운 것을 나쁜 학자놈들은 일본이 조선에 좋은 일을 한 것 중 하나라고 하지만 지들에게 필요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었 듯 기업들도 자기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를 자신들이 돈을 들여 교육시키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박정희가 기업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고 '어린 백성'들에게는 바보교육을 시킨 게 지금도 사람들이 멍청하게 따라가고 있는 깃이지요. 지금도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을 믿고 있는 이 땅의 멍청한 백성들은 언제나 똑똑해질까요.

   누가 이런 말을 하던 가요? 그러니 내가 잘난 체 한 거죠.

2024-05-22

상나라를 부정한 이유

   내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국가의 시작은 상나라인데(하나라는 아직 신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사마천도 그랬고 공자도 그랬는데 주나라의 예와 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나라가 깨지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왔고, 전국 일곱 나라를 진의 정이 통일하여 China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진나라를 세우고 기원전 221년에 세운 통일국가는 기원전 206년에 무너지고 이 해에 한나라 세우고 기원전 202년 초나라를 파하고 통일을 이룹니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이고 사마천은 기원전 100년 경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 두 사람이 중국의 고대 역사와 철학을 확립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니 중국에서 상나라와 주나라에 대한 논쟁은 없습니다.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중국에 역사 내내 상명하복이 제일 중요한 가치입니다.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나라를 건국하려면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상나라의 주왕이 달기와 놀아나고 주지육림에 충신들을 죽인 것으로 기록이 되었는데 그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이야기 입니다. 역사를 모르더라도 중국의 고대국가 하, 상, 주의 멸망에 모두 '주지육림'이 등장합니다.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쉽게 보이는 것이지요.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진나라가 통일하고 '진서'외에 다른 역사서들을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찾아 불태웠고 그래서 서쪽 변방에 찌그러져 있던 진나라 역사서만 남아 사마천이 참고한 것은 중원의 정보가 희박한 것들이었고 그의 편협한 생각으로 그런 소설을 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상나라 정벌을 목숨을 걸고 막은 것과 상나라 정복 후 상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파견했던 왕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 등이 그런 의심에 합리성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책 '상나라 정벌'이라는 걸 보니 앞뒤 맥락이 연결이 되었습니다. 상나라 내내 순장은 약과였고 점을 치는 내내 엄청난 사람 제물을 썼다는 것입니다. 심지에 희생을 먹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먹은 것은 한참 뒤인 송나라 때의 소설에서도 보이지만 여튼 새로 들어선 주나라는 식인 뿐 아니라 희생을 사람으로 쓰는 것을 엄히 금했을 뿐 아니라 술도 금했답니다. 술이 점과 제사에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점을 치는 것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주역이라는 게 기존 점친 것을 정리한 것을 주나라의 '서백(문왕)'이 상나라 주왕에게 붙잡혀 감옥에 있을 때 공부하여 정리한 것이고 그래서 '주나라의 역서'라는 뜻으로 주역이 되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점을 치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이어 받았고 해석을 달리한 것입니다. 여튼 사람을 희생으로 쓴 것이 미개한 문명으로 인식이 되었던 것인 거죠.

사람 구별하기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정의롭게, 공평하게 사람을 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과 신분의 귀천貴賤 없이, 외모의 미추美醜 없이, 재산의 다소多少 없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그런데 정작 그런 사람 본 적 없습니다. 하다 못해 먼저 출근해서 나중에 출근하는 동료나 관리자를 맞이하는 인사의 태도에서 먼저 명확하게 사람들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몸에 밴 습관으로 가려진 본성의 태도는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해보면 드러납니다.

  그걸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것이 '유퀴즈'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큰 자기' 유느님과 '작은 자기' 죠셉이 손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스플릿 형태로 앉아 있어서 두 진행자를 손님은 함께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손님은 두 진행자 중 한 사람을 보게 되는데 이 때 그 사람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손님은 유느님을 주로 보고 심한 사람은 아예 한쪽만을 보며 인터뷰에 응합니다. 당연히 죠셉 쪽은 아닙니다. 그걸 보면 그들의 가식을 아주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죠.

  요즘에는 내가 '머저리의 준말이라고 하는 'MZ세대'의 언어와 꾸밈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차별하고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을 올려다 보고, 건물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어하는 걸 숨기지 않고 표시합니다. 인지상정이라구요? 맞습니다. 人之常情, 맞습니다. 사람이라면 늘상 가지고 있는 생각, 느낌, 선택, 情. 이 글자의 뜻은 '뜻'인데 쓰임은 초코파이 광고의 그 '정'입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유교 관점에서 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칠정'이라고 합니다. 희(喜) · 노(怒) · 애(哀) · 구(懼) · 애(愛) · 오(惡) · 욕(欲). 다 아는 것 같은데 하나가 다릅니다. 네 번째 입니다. 이것은 두려움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樂 대신에 들어가 있습니다. 희노애락애오욕은 불가에서 말하는 칠정입니다. 유가의 칠정을 봅니다.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일곱가지 마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가지고 있는 감정이고 그에 반해 공부를 통하여 몸에 익혀야 하는 네 가지가 '사단'입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이라고 했지만요.

  사단은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네 가지인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뜻이 다릅니다. 아름다운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여 전달하는 자들이 비천하고 나쁘게 바꾸어 전달하여 더러운 종교가 되게 한 것과 이것도 같습니다. 仁이라는 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의 '자비'보다는 기독교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義는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나쁜 걸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인들이 유교를 잘못 알고 있는 핵심입니다. 나쁜 것을 부끄러워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믿고 행합니다. 다음은 禮는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입니다. 이익을 보면 뒤로 빠지는 걸 말하는데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인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지혜롭다는 것을 우리가 흔히 쓰는 뜻과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기 논쟁이니 주기, 주리파니 해석들이 많지만 이처럼 해석하면 됩니다. 칠정은 인간이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 감정이고 사단은 애써 공부하여 지키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그러면 주나라의 법도인 '禮는 서인에 이르지 못하고 형은 대부에 이르지 못한다'는 계급정신에 입각해서 '나는 평민이니 굳이 사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을 할 사람들이 앞의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좋은 사람', '올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죠셉'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없겠지요. 볼 때마다 안쓰럽지만 또한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2024-05-13

아름다운 세상

   이 글을 쓰려고 하니 내 블로그의 대문에 있는 핵심 내용과 일치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세상은 내남이 없으며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하고 지금 이야기 하려는 것은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일만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름다운 것만 보려고 한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요.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눈감겠다는 것입니다. 그걸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냐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면도 있는데 굳이 나쁜 점만 들추냐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들 속의 논리 속에서만 삽니다. 그 논리는 데카르트나 파스칼의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처럼 일반적이지 않고 정말 멍청하게 우스운 것입니다. 대부분의 일이 한 면의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인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점만 보고 다독거리고 칭찬하고 가는 것이 앞으로 더 좋아질까요? 미진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고쳐서 나쁜 부분이 좋아 지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공자의 말씀처럼 나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의義(옳음)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해야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가 사라질 것은 너무 명확한 일이거늘 현상의 ㅜ족하거나 나쁜 면을 보는 사람을 비뚤어진 사람이라고 보는 시선을 그 자신이 매우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거나 세상의 부정의를 용인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지랖의 범위

   다른 사람의 불편이나 피해를 입을 것이 보이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보통은 도와주고 욕먹는 것이 아닌지로 고민하지만 나는 그보다 자신의 기준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번 주 길을 걷다가 카드 한 장을 주웠는데 농협 체크카드이고 용돈이 든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버린 줄도 모를 가능성이 크고 정지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어서 길에 그냥 둘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데 문제는 요즘엔 우체통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가까이 농협이 있어서 직원에게 주인을 찾아 줄 수 있냐고 물으니 받아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길에서 뭔가를 찾는 아이가 있어서 길을 유심히 보며 걸었더니 노란 카드가 보여 아이를 불러 찾는 것이냐고 물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오지랖이라는 게 생각이 났습니다. 한복의 앞 옷섶이 길고 넓어 지나가며 상을 쓸고 다닌 것에서 유래했다는 오지랖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 묻은(특히 이성) 이물질이나 셔츠 엇갈린 단추나 열린 바지 지퍼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오지랖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이미 건너고 있는 보행자를 건너도록 뒤에 차가 있어도 기다려 주는 것이나 뒤에 오는 사람이 먼저 지나가도록 출입문을 잡아주는 것 따위는 오지랖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버스를 타고 나갔다 왔는데 버스를 앞에서 타려고 하던 40 안팎의 여자가 뒤에서 타려는 나를 먼저 타라고 하는 건 오지랖이고 버스 뒷문의 뒤쪽까지 들어와서 앉은 할머니의 버스비를 다신 받아서 앞의 돈통에 넣고 온 것은 오지랖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일을 한 사람이 한 것을 오늘 경험했습니다. 

  해당되는 것인지가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이고 상대방이 고마워 하는지가 그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최소한 이것은 있습니다. 오지라퍼는 이런 모두, 그러니까 자신이 볼 때 바로 잡으면 더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은 참견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과 동네 소식통, 홍반장, 영웅은 동일합니다.

진인사대천명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멋있는 척 하는 거 즐겨 하는 사람의 집에 가면 많이 걸려 있는 글귀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여러 가지 입니다. 남송의 호인의 '독사관견'에 盡人事聽天命이 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