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신분에 따른 숫자 이야기가 나와서 비율을 찾아 보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나 통계청 자료에 나와 있긴 한데 대구와 울산의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을 하고 있고 그 폭이 50%를 넘으니 별 신뢰할 수 있는 게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가 의미있는 자료를 찾았습니다. 문과 합격자수.
김재호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의 한경 기고문입니다. 초기에 뽑은 수가 적은 데 개국 초기는 공신들이 관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적게 뽑은 걸로 추정이 됩니다. 식년시는 3년마다 실시하는 명나라 제도를 가져온 것이고 그 외에 여러 별시가 있었답니다. 가장 적게 뽑았던 태종과 세종 시기를 보면 태종 14명, 세종 13명으로 보입니다. 1400년에 태종이 등극했고 세종은 1418년 등극하고 1450년에 세종이 문종에게 물려 주었으니까 대략 두 왕의 시기에는 18*14+32*13=68명이 나오네요.
문종은 단명하여 2년동안이었지만 37명을 뽑은 것으로 보이고 7대 세조 때 떨어진 건 계유정난 공신을 대거 등용해서 적게 뽑은 것으로 봅니다. 시호에서 보듯 정권을 안정시킨 성종 때 적게 뽑은 것이 눈에 띄고 1년을 즉위했던 인종 때는 뽑지 않았습니다. 15대 광해군이 많이 뽑은 게 보이고 4년으로 단명했던 경종(20대) 때 많이 뽑은 게 눈에 또 뜨입니다.
양반을 관직을 받은 사람으로 본다면 이 문과 합격자 수로 보면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총 748회 14600여명에 불과하답니다. 이외에 소과(생원, 진사)는 벼슬 얻지 못한 것이고 무과와 잡과가 있습니다. 식년시의 문과정원이 33명, 무과 정원이 28명이었답니다. 무과도 벼슬을 가졌다면 그 비율 적용하면 될 것이고 잡과에 합격해서 벼슬을 얻었다고 해서 그들은 양반이 아니고 중인이었겠지요.
여튼 이것을 바탕으로 본다면 진짜 양반을 몇 안되네요. 도올이 그랬던가? 조선 후기 노비의 비율이 40%였다고 하지만 대구 인구자료로 보면 양반이 70.3%, 평민이 28.2%, 노비가 1.5%입니다. 1858년 자료입니다. 이 때는 철종 때인데 1801년 순조 때 공노비의 해방이 있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경국대전에 문무잡직 통틀어 5000~6000천 자리라네요. 6000자리, 한 사람이 10년, 조선왕조 500년으로 대충 계산하면 30만명이 되네요. 잡직까지 해서. 4인 가족이라면 120만명이 되지만 벼슬아치의 자손도 벼슬을 얻으니 절반으로 깎으면 60만명. 조선시대 통틀어.
숫자 놀음 재미있습니다.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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